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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학교를 떠난 그대에게


휴학은 생각했어도, 자퇴는 상상하지 못했다.
졸업이 현실이 됐을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학교'라는 무형의 울타리가 더 이상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 놀랐다.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데 익숙한 사람은, 쉽게 울타리를 뛰쳐나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대학교 1학년 때, 모두가 알몸으로 평등해지는 목욕탕에서조차 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S라인에 길고 가는 팔다리를 소유하고, 우유빛 뽀얀 피부를 가져서도 아니다. "대학생이에요?" "네" "어디 다녀요?" "....**대요"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때밀이 아줌마는 내게 "와 진짜 대단하다"며 "아니 어떻게 했길래 그런 좋은 학교를 갔대요?"라고 계속 물었다. 그때 알았다. 내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학벌은 강력하다는 걸. 졸업장이 필요 없을지 모르는 동생에게,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고 힘겹게 학교를 다니는 친구에게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그래도 졸업은 해야지"란 말을 했던 건 그래서였다.

어쩌면 나도 당신이 말했던 '거짓 희망'들을 품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시간들이 지나가면 나아질 것이란 막연한 믿음,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나무 밑에 누워 잘 익은 열매 한 알 떨어지면 받아먹을 심보로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룰은 정해져 있으니까, 세상은 그렇게 쉽사리 바뀌지 않으니까 지금 당장 급한 건 그 판 안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말이다.

그래서 당신을 응원하고 싶다.
섣불리 가지지 못할 용기를 가졌고, 섣불리 내리지 못할 결단을 내린 당신이기에.
그리고...그래서 슬프기도 하다.

사람들의 박수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을 테니까. 상처받고 힘겨워지는 나날들이 더 많을 테니까. 어느 게시판에서 본 말처럼, 그냥 '원숭이 하나가 우리를 탈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당신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그 용기와 포기조차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잊히는 것일테고, 그런 날들도 언젠가는 올테니까.

다만 나는 당신이 낙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체제를 벗어나 주어진 틀에서 탈주하기로 맘먹었다면 사람들의 무관심과 망각, 냉소와 홀대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까. '아는 만큼' 덜 겁먹고, 덜 상처받을 수 있게 낙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더 이상 그 길이 당신의 길이 아니라 생각될 때 바로 다른 길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용기 또한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우리는 '실패'에 대한 맷집을 키우지 못했으니까.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한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


그리고 당신이 말했던 무력함과 억울함, 그리고 젊음의 서글픔. 이 모든 아픔들의 기억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그런 '탈출 원숭이'로 남지 않기를 빈다. 앞으로 평탄한 길보다는 거칠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가 많을 테고 온몸에 생채기를 남기는 가시밭길도 만나게 될 테지만, 응원한다. 그게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