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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어느 할머니에 관하여

생활요가 시간에 손을 맞잡고 풀어주는 운동을 하고 있는 할머니들 ⓒ한겨레21


# "할머니가 오고가실 수 있게 문을 닫지 마세요."


남자친구 집 근처 구멍가게 옆 낡은 녹색 철문에 박스테이프로 붙여진 종이 한 장이 있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허리는 구부정한, 바람만 불면 쓰러지실 것 같은 할머니는 그날도 지팡이에 의지해 한 발짝씩 힘겹게 떼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남자친구가 위태로운 그녀에게 씩씩하게 인사할 때마다 옆에 있던 나도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곤 했다.


몇 달 전부터 철문은 굳게 닫혀 있다. 풀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빨리 일어나지만 너무 오랫동안 바람을 겪은 풀은 지치기 마련이다. 할머니도 그러신 걸까?


# 몇 해 전 돌아가신 친할머니를 생각하면 꼭 '밥'이 함께 떠오른다. 밥 때라기엔 이르거나 한참 지난 후에 가도 할머니는 맨 먼저 "밥 먹었냐"고 물었다. 당신이 먹다 남은 것으로 충분해도, 특히 아들이나 손자(인정하자, 할머니는 '남자'를 더 좋아하셨다. 옛날 분이셨으니까.)가 오면, 무조건 뻑뻑 쌀을 씻고 불에 안쳐 김이 모락모락나는 뽀얀 쌀밥을 내주곤 했다. 


정작 본인은 찬물에 그 흰 쌀밥을 꾹꾹 말아먹는 날이 많았다. 위장이 안 좋으신 편이었는데, 아버지는 어쩌다 한 번 내가 밥을 물에 말아먹으려고 하면 "너 할머니처럼 위에 병난다"며 말렸다.


할머니들이 나무로 만든 비석치기를 하고 있다. ⓒ한겨레21


병원에 누워 옴짝달싹 못하시기 몇 달 전만해도 미수(米壽)가 코앞이었던 할머니는 직접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걸레를 들어 방바닥을 닦으셨다. 시골집을 고치지 전에는 부뚜막이 있었다. 거대한 가마솥도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친가에 가면 그 가마솥에 감자 같은 걸 쪄주셨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너무 흐린 기억 속의 찐 감자여서 자신은 없다. 


초등학교 때였던가. 할머니께 "6·25(한국전쟁) 때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산속으로 달아나 1달 정도 숨어지냈고, 할머니는 공산당들 밥을 지어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시절만해도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고 살해당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저릿하고, 강릉 앞바다로 북한 잠수함이 침투했다는 소식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우리 할머니는 안 무서웠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가마솥에서 밥을 퍼 인민군 소년병에게 건네는 젊은 할머니를 상상해봤다. 역시나 할머니의 젊음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엄마가 그런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으니까. 


# 지난주 <한겨레21>에서 할머니들이 모여사는 전북 김제 '학수그룹홈' 기사를 봤다. 평균 연령 80.9살인 10명의 할머니들은 이곳에서 함께 허공에 다리를 구르고, 깎지를 끼며 요가로 몸을 푼다. 텃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상추를 솎아내 쌈밥거리로 나눠먹는다. 나무로 만든 비석치기는 심심한 일상에 적당히 간을 쳐주는 소금이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면 '6시 내고향'과 일일연속극, 9시 뉴스를 정주행하고 자식들 흉을 보거나 누구 자식이 더 잘났나를 겨루거나 옆자리에 누운 할머니의 등을 긁어주며 할머니들은 잠을 청하리라.


요가시간 중에 열심히 다리 운동 중인 할머니들 ⓒ한겨레21


2007년 마을 경로당이 집으로 변신하면서 학수그룹홈이 탄생했다. 김제시는 시골 고령화로 고독사와 노인 우울증이 증가하자 '그룹홈'이라는 노인복지 정책을 내놓았는데, 반응이 워낙 좋아 111개소까지 늘렸다. 이제 김제시 독거노인 7명 중 한 명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룹홈이 독거노인 문제의 정책 대안으로 좋다'는 입소문이 나 비슷한 그룹홈이 전국 40개 자치단체 227곳에 생겼다고 한다. 예수병원 산학협력단 그룹홈 입소자들에게 외로움 정도를 조사한 결과 93.3%가 "외로움이 줄었다"고 답했다.


아마 그곳에선 철문을 드나드는 할머니의 위태로운 발걸음을 볼 일도, 찬물에 꾹꾹 말은 밥을 후루룩 마셔버리는 할머니를 볼 일도 적지 않을까...? 구부정한 허리와 어느새 나보다 훨씬 작아진 어깨에 마음이야 먹먹하겠지만.


(이미지 출처는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