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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성공과 좌절, 승리와 패배 그리고 괴물과 인간

이 쓸쓸한 봄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는다. 오웰 스스로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책'이라 했던 이 빼어난 르포르타주는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스페인 내전의 정치드라마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증언한 고발서의 의미를 갖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스페인 인민의 열망 편에 서려고 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스페인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연합세력들에 의해 어떻게 배제되고 억압당하고 끝내는 죽음을 당했는지를 증언하는 책이다.

이 책보다 먼저 발표된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라는 에세이에서 소비에트를 등에 업은 스페인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연합의 정치적 논리는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너무 따질 것이 아니라 함께 파시즘에 맞서 싸울 때"라는 것이었다. 그 논리 아래 인민 민주주의 지향은 부르주와 민주주의에 의해 차단되었다. 스페인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식견이 너무 '오른쪽'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왼쪽'이어서" 처형당했다.너무 먼 역사이야기인가? 한 가지만 덧붙이자.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 오웰의 책은 소비에트와 연결된 자신의 이해를 실리적으로 계산하는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과 언론들, 심지어 출판사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 한 세기 전의 상황이 2012년 한국과 너무 닮아 나는 현기증을 느낀다.

이렇게 '배신당한 혁명'으로 프랑코 독재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파시스트들에게 쫓겨 스페인의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나는 1980년대 파리에서의 망명시절 국제엠네스티 프랑스 지부에서 일하던 스페인 출신 2세 한 여성을 알고 지냈다. 스페인에서 쫓겨 온 그녀의 부모세대들은 그 무렵 이미 힘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하나 둘씩 남의 땅에서 눈을 감았다. 동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백발의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래, 우리 삶은 실패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나는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들은 끝까지 권력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고발서라기보다 제목 그대로 '찬가'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여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인간들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기억하기 위해 오웰은 그것을 망각 속으로 밀어낸 권력정치의 드라마를 고발했던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 턱없이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이같이 불편한 글을. "대여섯 살부터 작가가 되리란 걸 알았다"는 탁월한 작가 오웰과 달리 내게 글쓰기는 언제나 고된 짐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왜 쓰는가? 우리에게도 분명 존재했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되찾고 싶어서다. 그 노래를 한 번 함께 불러보고 싶어서다.

오늘의 절망스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정당운동의 첫걸음이 지금과는 다른 인간의 미래를 앞당기려는 희망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언제부터 우리는 길을 잃게 되었을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언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권력에 대한 현실적 욕망으로 뒤바뀌고 진보정치가 권력정치의 주술에 갇히게 되었을까?

올해로 귀국한 지 꼭 10년이다. 진보정당 당원으로 살아온 시간과도 고스란히 겹쳐지는 이 10년 동안 내가 가장 빈번히 들었던 것은 "세상을 바꾸려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바꾸기도 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먼저 바뀌는지를 줄곧 지켜봐왔다. 그리고 진보정치와 조직노동이 스스로를 '민중권력'이라 강변하던 그 시간은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는 물론이고 그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배제된 노동자들의 숫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어선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나는 왜 쓰는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려고 인간의 고통과 시간을 건너뛰어 자유주의-진보주의 연합을 이룩한 저들의 허위와 몰락을 증언하기 위해 쓴다. 그리하여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기 위해.

-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프레시안> 기고문 중에서

통합진보당 사태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대위를 구성하는 쪽으로 가닥기 잡혔다고는 하는데, 일단 지금까지 쏟아진 기사들로 봤을 때는 '글쎄'다. 유시민이 애국가 얘기까지 꺼낸 마당이어서 설령 이번 사태가 수습되어도 상처는 계속 곪아갈 듯하다. 썩어문드러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치에 있어 '권력 의지'는 중요하다. 정당에게 '수권 정당'은 당연한 목표다. 그치만 '꼭 그게 전부일까?'라는 의문은 아직 남아있다. 죽어라 공부하던 중고교 시절의 내가 그랬다. 얄미운 아이, 꼭 이기고 싶은 아이들의 콧대를 누르는 게, 순수한 경쟁심만으로 가득한 싸움에서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밤낮 없이 공부하고, 누군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덕분에 나름 괜찮은 학교에 갔다. '모든 걸 가졌구나.' 뿌듯했다.  

하지만 진정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수많은 물음과 하루하루 쌓여가는 불안, 막막함, 그리고 책임. 승리라고 여겼던 일은 승리가 아니었고, 완성이라 믿었던 일 또한 불완전 그 자체였다. 조금씩 실패와 패배에 눈을 떠가면서 알았다. 실패와 패배 자체는 문제가 아니란 걸, '어떤 실패와 패배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홍세화씨의 글이 마음을 뒤흔들기에는 머리가 커졌다. 하지만 조금씩 스며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선거에서 이기는 일, 권력을 잡는 일,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정치는 결국 괴물이다. 힘으로 또 다른 힘을 키워나가며 비대해지는 것은, 무한증식하는 자본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리고 결국 '자본은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과 다를 바 없다. 아니 마르크스보다는 '괴물과 싸우다보면 또 다른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니체의 말에 더 가까운 듯하다. 지금의 통합진보당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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