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일, 행복하다.
그 싸움(한진중공업 투쟁 등)은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다. 나 혼자만 부각되는 건 너무 너무 부담스럽다. 2011년도 1월달 달력 있는 크레인에서, 정들어 한 번도 못 넘겼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달력 펼쳐져 있는 부분이 그대로 2011년 1월이더라.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간, 나눌 수 있던 시간들, 제 삶에 가장 의미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18살 때부터 노동자로 생활했다. 부산에 있는 대구실업에서 남자들 와이셔츠를 만들었다. 만 이천명 노동자가 있었다. 그때 임금 1만 8천원, 생리대도 살 수 없어 훔쳐 쓰는 사람들 있었다. 잠자는 시간 없이 ‘타이밍’이란 각성제 먹으며 철야근무했다. 10 몇살짜리들이 미싱으로 자기 손을 박는다. 눈을 뜨고서도 그랬다.
미국에는 나이키공장이 없더라. 1990년대 나이키 OEM 맡은 삼화고무에 김경은이란 노동자 있었다. 일하다 미싱바늘이 눈에 들어갔는데, 반장이 그냥 일하라고 해서 두 눈이 멀었다. 그때 19살이었다.
트위터에서 엄마가 ‘어린 나이에 부모 잃은 박근혜 불쌍하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봤다. 그 분이 ‘ 박근혜는 그래도 청와대에서 살았는데, 엄마는 밤새워 미싱 박고, 타이밍 먹으며 말하지 않았냐?’며 ‘엄마가 더 불쌍하다’고 했댄다. 그런 노동자들이 지금도 식당에서 일하고, 청소하고 비정규직으로 산다.
어린 아기들 신발, 여러분들은 보면 예쁘다고 하죠? 나는 ‘아 저 신발 만들며 얼마나 손에 미싱박았을까’란 생각부터 든다.
동두천 기지촌에서 살았다. 기지촌 주변에 죽은 아이 시신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그 시신을 갖고 놀았다. 아는 언니는 미군에게 끌려간 후 자살했다. 이유는 모른다. 짐작만 할 뿐이다. 내 친구 상철이는 신작로에서 넘어졌는데, 미군트럭이 그냥 깔아 뭉개고 지나가 죽었다. 우리 집은 다행히 가난해서 노동자로 살았다. 노동자로 살며 세상을 봤다.
질문지 받은 것 중에 ‘이번 총선에서 졌는데 어떡하냐’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앞으로 간다. 저는 이 세상의 변화를 믿는다. 진보를 제 눈으로 목격했다. 세상은 노동자들이 싸우고, 싸운 방향으로 바뀌었다. 노동자 내부에서도 반대했던 주 5일제 시행, 징역갔던 이유인 3자개입법 폐지 다 이뤘다.
선거로 이룰 수 있는 건 명백하다. 촛불집회부터 희망버스를 보자. 희망버스,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 아니다. 시민사회의 성숙 등을 거쳐 만들어졌다. 아직까지 이런 시민사회의 성숙, 역량을 정치가 담아낼 수 없다. 이뤄지지 않는 것들 계속 요구하면서 바꾸는 게 시민사회가 할 일이다.
이번 총선을 보며 답답한 부분은 있었다. 제가 비례대표를 어느 당 찍었을 것 같냐? 녹색당 찍었다. 제 삶이 지향하는 바와 가장 맞다고 생각했다. 진보신당, 통합진보당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적 역량 성숙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공약을 보면, 녹색당이 제 삶이 지향하는 바와 가장 가까웠다. 궁극적으로 그런 사회를 꿈꾼다. 현재 정당들이 집권했을 때 장애인들이, 성소수자들이, 여성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야 나아지겠지만, 더 멀리 봐서, 궁극적으로 차별 없는,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곳이 아닌 차별 없는 세상이 제가 꿈꾸는 것이다. 그걸 봤을 때 녹색당이 맞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꿈 이루겠죠? 후에 녹색당 가입해 텃밭 가꾸는 꿈꾼다.
울산, 창원에서 진보정당이 당선 못한 것 보고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패한 것 아니냐’는 의견들 있었다. 투표 안 한 분들 많더라. 단일화 과정에서 엄청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실망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기치를 내걸었던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맞는가? 권영길씨가 국민승리 21 대선후보였을 때, 부산본부 위원장이었다. 피가 터지게 선거 운동을 하러 다녔다. 신한국당이 가수 부르고, 장비 잔뜩 차려 다녔을 때 우린 아무 것도 없이 투혼을 불사르고 했다. 그 과정에서 뭐가 남았는지 평가가 지금도 제대로 안 됐다. 당선을 목표로 하는 선거운동은 내 목표가 아니었다. 노동조합 내에 정치부서라도 만들어서 노동자들이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들을 펼쳐내기란 대단히 어렵다고 느꼈다.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남들과 다르다’며 차별을 부각시킨다. ‘쟤들 보다 우리가 낫지 않냐?’ 하지만 한 번 우리 잘못이 드러나면 ‘멘붕’이다. 달라져야 한다. ‘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건,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선거’ 때만 후보를 내세워서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울산, 창원의 경우 울산만 해도 비정규직들이 투표를 거의 안 했다. 지금껏 후보들,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을 보며 차별을 못 느낀 거다. 그 사람들 봤을 때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은’ 것. 지금의 운동은 비정규직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
그럼 어떤 운동이 되어야 할까? 얼마 전 현대차 정규직노동자가 분신 자살했다. 한 청소노동자가 “정규직이 왜 죽었냐”고 묻더라. ‘죽음’이 아니라 ‘정규직’이라는 게 질문의 핵심이었다. ‘현장 통제’ 때문이었다고 하자 “정규직들은 그만한 일에 죽습니까?”라고 했다. 이 처절하고 안타까운 죽음마저 같은 노동자인 비정규직에게 설득되지 않는다. 삶이, 생활이, 꿈이 다르다. 정규직들의 꿈?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정규직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 현대차 노조가 엄청 욕 먹은 게 단협에 정규직 자리를 자식들에게 넘겨주는 내용을 넣어서다. 사실 그런 단협 넣은 정규직 조합들 많다. 그런 문제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 전에, 대부분 정규직 노동자의 자식들이 비정규직으로 산다. 임금 대부분이 학원비로 들어간다. 노동시간 줄었다지만, 잔업시간 그대로다. 그렇게 일해서 자식 가르쳐봐야 비정규직밖에 갈 데가 없다. 그래서 내 자리라도 넘겨주려는 ‘웃기는 양태’가 됐다.
하지만 비정규직 조합은 임단협도 제대로 못 한다. 현대차 정규직이 임금으로 파업하면, 조중동보다 그 공장 하청노동자들이 먼저 욕한다. 서울 지하철 기관사가 죽었다. 그가 왜 죽었는지, 어떤 근로조건으로 일했는지를 파악하는 게 먼저인데 ‘왜 지하철에서 죽어서 18분이나 막히게 하냐’란 반응이 우선이었다. 공황장애가 있던 사람이었다. 나도 기관실에 타보기 전까지 몰랐다. 기관실에서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꼬불꼬불한 길, 시멘트만 보는 거다. 승강장에서 누군가 떨어지는 환상도 겪는다. 터널 안에서 사고 나면 기관사들이 직접 시신을 수습한다. 그 고통을 아는 사람인데, 터널 안에서 달리는 지하철에 뛰어들어서 죽었다. 이건 복수도 아니다.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 이른바 ‘철밥통’ 노동자들의 모습이 그렇다. 몇 년 전만해도 지하철 기관사 등이 각광받는 자리가 아니었는데, 워낙 일자리가 없다보니 그런 직업이 ‘노동 귀족’이 됐다.
노동운동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가. 사실 크레인에 있을 때,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그런 문자 보냈다. ‘민주노총만 있었다면 살아서 크레인을 못 내려갔을 거다. 희망버스 덕분에 살아서 내려가는 거다.’ 민주노총도 집회를 했다. 하지만 기자들도 안 물어보고, 경찰들도 대오를 형성하지 않는다. 희망버스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배터리도 없는데 기자들한테 자꾸 전화왔다. 나도 처음에 민주노총버스가 위장해서 오는 줄 알았다. 민주노총버스였으면 이름도 길었을 거다.
2011년도에 희망버스를 탄 사람과, 안 탄 사람이 나뉜다. 희망버스 탄 사람도 담을 넘은 사람도 안 그런 사람이 나뉜다.'니들이 월담 맛을 알아?' 하더라(웃음). 2차 때는 만 2천명이 왔다. 경찰이 차벽 치고, 최루액 쏘고 연행해서 사람들이 크레인에 접근도 못했다. 보지도 못했다. 3차 때는 삼복도로를 3~6시간 돌았다더라. 희망버스를 기다리며 땡볕 속에 서있는데, 어디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리더라. 삼복도로 위에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한 50명 설 수 있는 공간에서 크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 있더라. 그게 끝인 줄 알았다. 웬 걸,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하더라. 만 5천명이 그걸 했다고 생각해봐라, 몇 시간 동안 팔 흔들었다. 겨드랑이 밑에 가래톳이 설 정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다가 ‘어? 물이 쏟아지네? 근데 왜 파랗지?’ 하더라. 그걸 트위터로 보는데, 도저히 못 보겠어서 껐다.
트위터를 하다 운동하시는 분에게서 DM을 받은 적이 있다. 나한테 얘기하기까지 한 달 고민했다더라. 70년대 암흑 밝힌 것은 전태열 열사, 80년은 박종철이 있었다. 이제는 당신이 횃불이 될 차례다. 전 세계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그때 정말 횃불이 되어야 하나 생각했다. 가장 힘든 때였다. 200일 좀 넘었을 때였다. 용역들이랑 싸우고, 공권력 투입한다 등등 이야기가 있었다. 20 몇시간을 밥도 못 먹고, 용역들에게 똥 던지며 싸웠다. 제일 힘든 건 ‘이 싸움이 언제 끝날 것인가’하는 점. 기약 없다는 것. 너무 절실했던 건 ‘저 새끼들(회사)는 사람 하나 죽어도 눈깜짝 안 할 거다’였다. 조합원들 불안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중엔 너무 힘들어서 트위터에도 올리지 못하겠더라. ‘이 싸움이 정말 내가 죽어야 끝나겠구나’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번 들었다. 그때 밑을 내려다 봤다. 새벽에 우리 조합원들이 번갈아 가며 노숙하는데, 모습이 다 똑같다. 전부 크레인 쳐다봤다. 매일 저녁마다 ‘제발 살아서 내려라’며 백배서원하는 사람들, 미사보시는 수녀님들, 무슨 일 생기면 비행기·KTX 타고 오는 사람들. 어느 순간부터 보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고 묻고 싶었다.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때부터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2003년 같은 일(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의 죽음)이 또 일어나면 저들 중 누군가 8년 동안 보일러를 못 틀고 살겠구나. 찬물로 머리 감고, 손발에 동상 걸리는 사람이 생기겠구나. 일주일을 고민했다가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너나 죽으세요.’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용역들이 노다지 뛰어올라왔다. 크레인 난간 폭이 조금만 더 넓었다면 진압당했을 거다. 한 사람만 서있을 수 있는 폭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대소변 처리했냐고 물었는데, 처리할 것도 없었다. 그게 폭탄이었다. 그것만 손에 들면 용역들이 ‘제발 제발’했다. 모기 때문에도 고생 많이 했다. 피부가 상해 고생하는 조합원도 있었는데도 약을 안 줬다. 크레인 브레이크핀도 빼놨다. 그럼 바람 불 때 크레인이 넘어간다. 무당이 ‘김진숙은 안 죽는다’고 했다더라. 사장이 천주교 신자다.
그런 놈들과 싸웠다. 하지만 이 싸움이 제가 중심이어선 안 된다. 조합원들과, 희망버스와 함께 싸웠다. 우리 정치는 메시아를 기다리는데, 정치세력은 ‘집단’이다. 집단이 싸우며 이뤄가는 것, 그것이 정치세력화다. 누군가 나타나 싸우길 바라는 것은, 그 한 사람의 불행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좋지 않다.
- 쌍용차, 왜 잘 안 풀릴까?
가장 무거운 짐이다. 사실 77일 옥쇄파업 때, 봉쇄를 풀었어야 했다. 그걸 풀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했는데.. 갇혀 있는 동안의 상처가 너무 컸다. 아이가 보는 앞에서 처절하게 짓밟힌 아빠. 한진도, 사원아파트 사니까 아이들이 같은 곳에서 태어나고 같은 유치원 다닌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고자와 비해고자의 아이가 함께 안 논다. 해고자 아이들은 용역놀이를 한다. 간단하다. 잡히면 무조건 맞는 거다.
평택의 한 교사가 반 아이들에게 “아빠가 쌍용차에 다니는 사람 손 들어봐라”고 했다. 여섯 명이 있었다고 한다. 교사가 선의를 갖고 물어보지 않는단 걸 안다. 아무도 손을 안 들었더니 “다행히 우리반에는 빨갱이 자식이 없군” 했다더라. 쌍용차는 특히 해고자와 비해고자의 갈등도 컸다.
22번째 사망자. 해고자, 미혼, 김포의 임대아파트. 23층에서 투신. 그에 대해 남은 것은 전부다. 사망자들은 모두 유서도 안 썼다. 대한문 가봤더니, 공황상태더라. 지금까지 사망자들은 주로 무급휴직자들, 희망퇴직자들이었다.
아빠가 주야 맞교대 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꿈꾸는 것도 없던 가족. 아빠가 해고되면서 모든 게 무너졌다. 사원아파트 살았는데, 아줌마들이 수근거렸다. “저 집은 남편이 해고 당했는데도 마트에 다니네.” 옆집 현관문이 닫혔다. 엄마가 17층에서 투신했다. 아이도 몇 번 자살시도를 했다. 아침마다 밥을 하던 아빠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빠마저 죽었다. 무급 휴직자였다. 1년 후 복직을 약속했는데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도 책임지고 있지 않다. 아빠가 남긴 건 만 8천원 든 통장과 시신 옆에 곱게 개인 쌍용차 작업복이었다.
“왜 우리는 희망버스가 안 올까? 우리도 크레인에 올라야 하나?” 쌍용차 노동자들이 말한다. 누군가 참혹하게 죽어야 눈을 돌린다. 아니 그래도 눈길 안 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야했다 생각했던 건 내게 와서 손 흔들어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23번째 사망자를 막는 것도 그 길이 아닐까. 우리가 찾아가서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라고 보여주는 것.
왜 우리는 돌아보지 않는가. 그걸 너무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다. 시간이 가고 싸움이 길어지는 것보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일. 김정우 지부장이 트위터에 이렇게 썼더라. ‘왜 선거 때조차도 우리는 이슈가 되지 못하는가. 왜 쌍차는 철저히 외면당하는가.’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현재로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과 행복했던 순간은?
별로 고민 안 하고, 후회 안 하는 편이다. 하지만 진짜 쪽팔렸던 일이 있다. 징역 가서 사형수를 만났다. 매우 유명한 여자였다. 남편을 독살한 사람이었다. 근데 들어가서 보니 주로 여자들만 빨래하고 청소하더라.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한테 ‘죽더라도 죗값해야 한다’며 일을 다 시키더라. 사형수라고 24시간 동안 수갑 차고 있었다. 단지 측은지심 때문에 ‘수갑 풀어달라’고 싸웠다. 문을 발로 차고 그러다 징벌방에 갔다. 징벌방은 정말 무섭다. 문이 이중이다. 내가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나는 고양이 발소리도 듣는다. 귀가 매우 예민해졌다. 교도관들 발자국 소리만 하루에 세 번 기다리며 산다. 작은 식구(밥을 넣어주는 구멍)가 하루에 세 번 열린다. 양손 양발이 뒤로 묶인 상태였다. 죽을 주더라. 무슨 뜻인지 몰랐다. 묶여 있으니까 핥아 먹으란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이걸 핥아 먹느냐’며 단식 선언했다. 근데 그 어두운 방에 죽과 나 단둘이 있는 거다. 밥보다 죽이 더 유혹적이다. 오로지 ‘저 죽을 한 입만 핥아 먹자’는 생각만 했다. 온 몸을 움직여서 죽을 쏟았다. 그걸 핥아 먹었다. ‘이렇게 하면 모르겠지. 단식을 하면서도 안 굶어죽는 방법이다.’ 살면서 그게 가장 부끄럽다. 나는 본 것 아니냐.
징벌방에서 살고 나오니까 ‘앞으로 504번(김진숙)는 그런 방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더라. 그 사형수 5001번이 일주일 내내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울었다더라. 징벌방에서 가장 무서웠던 건 ‘내가 이렇게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하는 점이었다. 그런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이 사형수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갑 찬 그 사형수가 내 더러운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면서 울었다. “나는 죄라도 지었지만, 진숙씨는 이렇게 죽으면 어떡할래?”
행복했던 기억이라면.. 엄마가 스무살 때 돌아가셨다. 매우 작으셨다. 가끔 엄마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면 문득문득 ‘엄마가 탔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와 자전거를 타고 저녁노을을 볼 때, 참 행복했다. 그리고 재작년에 캄보디아서 콩단이(후원하는 아이)를 만났을 때 행복했다. 내가 뭔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한편으로는 부담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힘나게 하더라. 이래서 ‘자식이 원수’라면서도 키우는구나 싶다. 그리고 또 하나가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 날라리들을 만나는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와서 기도하고, 함께 싸우고 울고, 그럴 수 있을까?’ 30년 동안 운동했지만 ‘과연 나도 저럴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했다. ‘사람이 희망’이란 말이 새록새록 돋는다. 50이 넘어서도 사람에게서 배우고 깨우치는 게 참 크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사람들만 보고, 그들과 운동했다. 요즘 사람들을 보고 폭넓게 대화하는 게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느낌을 준다.
- 글과 말솜씨는 타고났나?
우리 어렸을 땐 책이 별로 없었다. 태어나서 제일 처음 읽은 책이 <엑소시스트>였다. 학교 앞에 중고 책장수 아저씨가 왔을 때 옆에서 구경하며 읽었다. 중2 때 <경향신문> 배달을 했다. 그때 신문에는 한자가 많았다. 부라더미싱 사장 집 앞에 등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앞에서 한 부 남은 신문 반정도 읽고 그랬다. 그런 영향도 있었던 것 같고.
글은 쓰고 싶을 때 써야 하는 것 같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소금꽃 나무>에 실린 글들 대부분 연설문이다. 청탁 원고는 못 쓴다. 연설문 써야 하면 한참 고민한다. 사람들 이야기 다 쓰고, 덕담집도 찾고 밤 새워 쓴다. 그리고 어렵게 못 쓴다. 듣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한다. 주로 한진 아저씨들이 와서 듣는다고 생각한다.
- 조국 교수가 쓴 ‘철수와 진숙이 만나야 한다’를 읽어 봤는지?
보려고 해도 알아야 하지 않나. 그분은 크레인에 오지도 않았고. 은막의 스타가 같은 분이어서 잘 모르겠다. 판단하려고 해도 뭘 알아야 하는데,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조국 교수가 트위터에 안철수와 김진숙을 비교하며 ‘안철수는 우리사회 사람들이 가장 이루고 싶은 모델’이고 ‘김진숙은 유명하긴 한데 별로 닮고 싶지 않은 삶’이라고 썼더라. 거기에 ‘그럼 안 교수는 쉰들러고 저는 프리모 레비냐?’고 묻었다. 쉰들러는 재력도 있어 사람들을 빼냈고,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절망감으로 죽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는데 깊이 공감했다. “세상에는 악마가 있다. 그런 악마보다 더 두려운 건 악마를 인식 못하는 사람들이다.” 2012년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 아닐까? 비정규직, 지역주의라는 현실을 깨려는 노력이 있지만, 그런 모습들이 보이는 한국사회라는 거다.
안철수씨와 만나고 싶지만, 만나지겠나? 워낙 극단의 삶이라, 잘 모르겠다.
- 보통사람들보다 민감한 편인 것 같다. 유머러스하면서도 무겁고, 강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여리고, 진짜 성격은 어떤가?
저도 크레인 올라가면서 ‘내 성격이 이랬나?’ 싶었다. 저 자신을 오해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낙천적이라는 건, 징역 살고, 대공분실 끌려가고 그러면서도 ‘니들이 그래봤자지’란 생각했다. 크레인에서 김정운씨 책 뒷편에 ‘개와 늑대의 시간은 짧다, 지나간다’는 말에 공감했다. 대공분실에 끌려간 때가 26살이었다. 옷을 다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히더라. 알몸으로 작업하면 기분은 좋은데 살점이 묻어나서라더라. 살점이 묻어 군복이 안 벗겨질 정도로 맞았다. 그 다음 거꾸로 매달렸는데, 있던 자리에 피가 고여 있더라. 몸이 아니라 눈에 피가 나서였다. 그러고도 살아남았다. 대공분실 세 번 갔는데,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했더니 ‘너 같은 사람 처음 봤다’고 했다. 그제서야 ‘내가 이겼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극단적인 일들을 겪으면서 변했던 것 같다.
집이 강화였다. 7살 때 노을 지는 걸 보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소설이나 수필도 아주 감상적인 글들을 아주 좋아한다. 공지영의 <빗방울..> 이런 책 정말 좋아하는데 한 번도 말 못하고 살았다. 사람들이 <노동 투쟁..> 같은 것만 보는 줄 알더라. 이 모습들을 이번에 처음 드러냈다.
- 멘토가 있는지?
가족들하고 먼 편이고, 그들에게 준 상처가 크다. 가족들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밥 해준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버티게 해준 황이라 동지. 아무도 없었고 용역 수백명의 눈이 나만 지켜봤다. 강아지까지 끌려나갔다. 그래서 나중에 개가 검은 옷 보면 짖더라. 날라리들과의 교감도 있다. 한진이 무슨 짓을 해도 ‘다시 싸울 수 있겠다’란 느긋함이 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든든하고 위안이 된다.
- 올해 꿈은? 쓰고 싶은 책이 있다면?
<소금꽃 나무> 이후 다시는 책 쓰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솔직히 ‘이런 걸 책으로 남길 가치가 있는지’ 싶다. 나무들에게도 미안하다. 책 나오기 전까지 매일 아침마다 산에 갔다. 책 나온 후 딱 끊었다가 이번에 조합원들과 처음 산에 갔다. 나무들에게 미안했다.
크레인 올라가기 전까지는 오직 복직만 꿈꿨다. 그런데 지금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이제 그만 꿈을 이루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우리 조합원들도 11월 10일날 복직하길 바란다. 그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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