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 처음으로 망원경으로 목성과 토성을 만났다.
하늘에 스티커처럼 붙어 있는 줄 알았던 그 별들이 사실은 행성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진가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은 그의 사진집에서 ‘결정적 순간(a decisive moment)’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17세기에 한 프랑스 추기경이 했다고 전해지는, ‘그 어떤 것도 결정적 순간을 갖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거나 나에게도 결정적 순간은 있었고, 행성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갈릴레오는 약 400년 전에 내가 그날 본 것과 똑같이,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작은 망원경을 이용해서 목성과 그 주위를 도는 위성들을 오래 관측했고 그 결과 지구 역시 태양을 도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미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행성들을 바라보는 사이에 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태양계 안에 있는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발붙이고 있는 작은 존재임을 확실히 느꼈던 순간이었다. 1994년 7월에 슈메이커-레비(Shoemaker-Levy) 혜성이 목성에 충돌하는 광경이나 1997년 7월에 소저너가 화성 위에 착륙하던 장면은 나에겐 아마 이 결정적 순간의 전조였던 것 같다. 그 날 내가 인식하는 공간은 지구 바깥까지 넓어졌고, 나는 결국 천문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마치 영화 <메트리스>에서처럼, 빨간약을 먹어버린 네오랄까.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내가 과학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나에게는 자연과 함께하며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고, 과학자를 동경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런 결정적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장황하게 풀어 썼지만 지금 대학원생으로서 과학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 모두 이런저런 특별한 경험들과 결정적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른 경험, 다른 기억을 갖고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내가 왜 과학을 하고 있는지, 내가 왜 과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게 내 스스로 갖고 있을 것이다.
.....(중략).....그 결정적 순간 이후 나는 꽤 적극적으로 변했다. 특히 누군가에게 천문학을 알리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마추어 천문동아리 활동을 했고 나를 이해해주는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났다. 대학에 와서는 학과 교수님의 제안으로 ‘과학대중화 사업팀’을 결성하고, 동기 및 선후배들과 함께 천문학 강연과 야외 시민 관측회 등을 꾸려나갔다. 또한 어린이 과학캠프에 아동지도교사로 참여해서 초등학생 아이들과 과학 실험을 함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던 이유 역시 모두 내가 겪은 ‘결정적 순간’ 덕분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결정적 순간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런 순간들을 목격하고 함께하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했지만 그 순간이 그렇게 쉽게 눈에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 속이 상하는 경험을 한 적은 있다.
어느 맑은 날 과학대중화 사업팀원들과 함께 서울 한강에 있는 선유도 공원에 망원경을 들고 가서 시민관측회를 열었다.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서 지나가던 시민 분들이 꽤 많이 오셔서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 미리 맞춰놓은 천체들을 들여다보시고는 상당히 신기해하고 재밌어하셨다. 그런데 부모님과 함께 지나가던 초등학생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와서 줄을 서더니 이내 망원경 접안부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토성을 보았던 것 같은데 학생이 무척 신기해하며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봤고, 마침내 자신도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런데 옆에 서있던 어머니의 말이 그 순간에 찬물을 끼얹었다. “XX야,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야지.”
.....(중략).....대학교 2학년이 되어 천문우주학과에 배정받았을 때, 당시 학과장이셨던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여러분은 매우 고집이 센 사람들인 게 분명합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 천문우주학과에 왔을 테니까요.” 그렇다. 나 역시 아마도 고집이 센 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아이는 어떨까? 아이의 말처럼 천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역경이 예상되었다. 부디 아이의 고집이 그보다 세기를 바랄 뿐이다.
- 배현진, '나는 왜 지금 과학을 하고 있을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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