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하성란, 4/28 <한겨레> 기고문 중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은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하는 건 그 때문이다.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아침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날들이 이어졌을 것이다. 머리맡엔 이런저런 소지품들이 널려 있다. 자명종과 혹시나 떠오를지 모를 이야깃거리를 적을 노트와 볼펜, 읽다 만 책, 안구건조증에 쓰는 인공눈물 등등. 급작스럽게 떠난 그의 머리맡엔 무엇이 있었을까.
그가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낼 시집 목록들, 여름호에 발표할 미완성의 시, 벗어둔 안경…… 그는 내일 등교할 아이들에게 당부할 말을 생각하며 잠들었을는지도 모른다. 곁에 누운 아내의 말이 웅얼웅얼 잠결에 묻혔을 것이다. 그의 머리맡에는 내일을 기약하는 것들이 널려 있었을 것이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 중에서
그의 친구이면서 나에겐 선배이기도 한 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가 지금까지 출간했던 잡지를 이어받아 계속 출간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사무실을 정리하다 보니 그 흔한 빚 하나 없다고 그가 말끝을 흐렸다. 인쇄소나 지업소, 디자인실 등 조금씩 묻어둔 외상이 있을 법도 한데, 단정한 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이십여 년 전 학교 근처의 술집 어두운 뒷골목도 다시 떠올랐다.
그날 내가 본 건 정말 그였을까. 설사 술을 마시고 치기를 부리던 남자애들 사이에 그가 있었다고 해도 그 모습이 그의 전부였을까. 치기 없이 어떻게 그 시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부분을 전부로 알고 말 한 번 붙이지 않은 나는 그보다 한참 더 치기 어렸었다. 나는 어리석었다. 어리석어 훗날의 만남을 기약했다. 어리석어 그의 죽음 뒤에야 남아 있는 날들에 대해 헤아려보게 되었다. 그 어떤 날이 되든 우리맡엔 늘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집 말고도 그에게 또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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