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은 계속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은 뜬금없이 찾아왔다. 아마도 2008년 5월쯤이었지 싶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아니면 돌아오는 길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동네 골목길을 걷고 있었고, 순간 바람이 불었고, 나는 결심을 했다는 점이다. 무슨 영화도 아니고, 거짓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그날 나는 '기자'가 되기로 맘먹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야 늘 있었고, 아예 휴학하고 인터넷 매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글 쓰는 기계가 된 모습을 보고 실망한 건지 아니면 선명한 그들의 생각에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어서였는지 혹 그때까지도 터널 속에 머물러 있던터라 사람에게 다가기 어려워서였는지 학교로 돌아온 나는 '기자'에 흥미를 잃었다. 어쩌면 졸업이 더 급하다는 걱정이 컸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마냥 튀어나온 못처럼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걸 수도 있다. 갑자기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실험실에 나가고 한 달 동안 포항에 머물렀다. 이런 저런 상념과 삽질인 줄 알았던 경험들이 쌓인 끝에 결국 다시 '기자'라는 결론으로 되돌아갔다. 그게 벌써 3년 전 일이다.
솔직히 환상은 없었다. 그냥 좀 더 경쟁력 있고,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운수 좋은 삶'을 조금이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끌어가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정의사회 구현이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회의는 아니지만 그랬다.
시간이 흐르고 쌓여가는 실패들의 무게로 힘겨웠다. 그만 두고 싶은 순간들도 찾아왔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런 고민들을 붙들고 머리를 싸매기에는 시간이 많이 지났고, 나이를 먹었다. 문제는 '다른 고민'이다. '2011년 대한민국'이란 공간에서 기자로 살아간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가? 희망 또는 절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의미'가 궁금하다. 몇 년 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떤 기자는 투사가 됐고, 어떤 기자는 회사원이 됐다. 약자들의 언어는 날을 세운 채 트위터, 아고라를 채우고 강자들의 언어 역시 날을 세운 채 '기성 언론'을 채운다.
통로가 다르고 방향이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갈등의 골이 끝을 모르고 깊어져가는 것일까? 그래서 두려웠다. '너는 어떤 편이냐'고 묻는 면접관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걱정이었다. 운 좋게도 아직 노골적으로 '입장'을 묻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은 없다.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경험은 있지만, 그 물음 자체가 나를 '판명'하기 위한 것이라 느끼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불안은 스스로를 먹고 더 자란다.
보도의 객관성 자체를 의심하는 편이지만, 다 떠나서 무엇이 '공익'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공(共)은 또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익(益)이 달라지기에 더 망설이게 된다. 약자와 강자가 누구인지는 너무 선명하지만, 그걸 전달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 거짓 혹은 신념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그리고 이후에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해야 하는 일'은 알지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계속 묻게 된다. 이 시대에 언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냐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 따라갈 수 있는 변화들이 점점 줄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야 늘 있었고, 아예 휴학하고 인터넷 매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글 쓰는 기계가 된 모습을 보고 실망한 건지 아니면 선명한 그들의 생각에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어서였는지 혹 그때까지도 터널 속에 머물러 있던터라 사람에게 다가기 어려워서였는지 학교로 돌아온 나는 '기자'에 흥미를 잃었다. 어쩌면 졸업이 더 급하다는 걱정이 컸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마냥 튀어나온 못처럼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걸 수도 있다. 갑자기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실험실에 나가고 한 달 동안 포항에 머물렀다. 이런 저런 상념과 삽질인 줄 알았던 경험들이 쌓인 끝에 결국 다시 '기자'라는 결론으로 되돌아갔다. 그게 벌써 3년 전 일이다.
솔직히 환상은 없었다. 그냥 좀 더 경쟁력 있고,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운수 좋은 삶'을 조금이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끌어가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정의사회 구현이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회의는 아니지만 그랬다.
시간이 흐르고 쌓여가는 실패들의 무게로 힘겨웠다. 그만 두고 싶은 순간들도 찾아왔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런 고민들을 붙들고 머리를 싸매기에는 시간이 많이 지났고, 나이를 먹었다. 문제는 '다른 고민'이다. '2011년 대한민국'이란 공간에서 기자로 살아간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가? 희망 또는 절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의미'가 궁금하다. 몇 년 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떤 기자는 투사가 됐고, 어떤 기자는 회사원이 됐다. 약자들의 언어는 날을 세운 채 트위터, 아고라를 채우고 강자들의 언어 역시 날을 세운 채 '기성 언론'을 채운다.
통로가 다르고 방향이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갈등의 골이 끝을 모르고 깊어져가는 것일까? 그래서 두려웠다. '너는 어떤 편이냐'고 묻는 면접관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걱정이었다. 운 좋게도 아직 노골적으로 '입장'을 묻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은 없다.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경험은 있지만, 그 물음 자체가 나를 '판명'하기 위한 것이라 느끼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불안은 스스로를 먹고 더 자란다.
보도의 객관성 자체를 의심하는 편이지만, 다 떠나서 무엇이 '공익'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공(共)은 또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익(益)이 달라지기에 더 망설이게 된다. 약자와 강자가 누구인지는 너무 선명하지만, 그걸 전달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 거짓 혹은 신념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그리고 이후에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해야 하는 일'은 알지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계속 묻게 된다. 이 시대에 언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냐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 따라갈 수 있는 변화들이 점점 줄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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