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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신문을, 책을 보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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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친구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전쟁놀이 중이고, 장난감 총이란다. 그런데 저 눈빛이, 텅 비어있는 듯하면서도 무미건조해보이는 저 눈빛이 두렵다. 지난 1일 <중앙일보> 1면에 '전쟁이 아이들 눈빛을 바꿔 놓았다'는 제목으로 실린 사진이다. 누군가는 그걸 낚시질이라고 했다. 어쨌든 장난 아니냐며, 과거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때 '안심하고 맛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시민' 사진을 조작했던 곳답다고 말이다. 황색 저널리즘이 낳은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사진이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저 눈빛만큼은 잊지 못하겠다. 못 한다.

한 아이가 5월3일 리비아 벵가지에서 열린 리비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반대 행진에 참여한 탱크 포신에 거꾸로 매달린 채 웃고 있다.ⓒA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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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잇따라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자 한 방송사의 PD가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노동 문제에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한 두 달 사이에 네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국 곳곳을 다니며, 스스로 목을 매거나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노동자들의 삶과 주변의 모습을 100여 개의 테이프에 담았지만, 도대체 내용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일요일 우리 연구소에서 만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두어 시간에 걸친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그 PD가 나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분신하거나 목을 맨 그 노동자들 입장에서 한 마디 해주십시오."

그 물음에 나는 겸손하게 답했다.

"그 노동자들의 심정을 내가 어떻게 몇 분의 일이라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129일이나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에서 외로움을 견디다가 목을 매야했던 사람이나, 1년 반 동안이나 수배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불을 지른 사람의 심정을 내가 어떻게 몇 분의 일이라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그 PD는 어이없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푸념하듯 그러나 조금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 말에 비웃듯 내뱉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떻게든 그걸 한 번 해 보겠다고,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 나는 부끄러웠다. 우리가 '제도언론'이라고 비웃는 방송사 PD조차 노동자들의 절실한 상황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전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있었나? 30년 가까운 알량한 노동운동 경력이 그 PD 앞에서 단번에 무너져 내린 이유가 무엇일까?

직접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그렇게 컸던 것이다. 1년 반 동안이나 수배 생활을 하다가 분신한 노동자 집에 찾아가 무심코 냉장고를 열었을 때, 두터운 곰팡이가 하얗게 덮여있는 반찬들을 직접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산 것과 죽은 것만큼의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4천원 인생> 추천의 글 중에서


동경이가 그랬다. "세상은 밤처럼 까맣고, 작은 불빛조차 드물다." 한 우주에 갇혀 있는 개인이 느끼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의 우주가 저마다 흩어져 제각각 속도로 돌아가고 있을 뿐, 하나로 포개지는 일은 없어지는 느낌이다. 모든 세상이 밤처럼 까맣고, 작은 불빛조차 드물어지는 듯하다. 무엇이, 삶을, 세상을 좀더 촘촘한 점묘화로 바꿀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