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우리는 단지 운이 좀 달랐을 뿐이다

차창 밖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거칠게 써내려간 현수막 글씨. 그해 여름 아버지 차를 타고 쌍용차 공장을 지나갈 때 나는 숨이 턱 막혀오는 듯 했다. 덥고 습한 공기 탓만 하기에는 공장 곳곳을 둘러싼 검은 옷차림의 전경들, 멀리 보이는 파업의 풍경들이 너무 많았다. 공장의 기계는 멈춰있었고, 그곳은 전운의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차창 밖 그 풍경들은 손에 잡힐듯 하면서도 멀리 느껴졌고, 설령 잡힌다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다행이라고 여기며, 무전기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교신하는 사복경찰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던 것 같다.

세상이 점묘화가 되고 있다. 세밀하지 않고, 드문드문 벌어진 틈이 많은, 파편화된 점들의 세상. 무너져가는 대추 초교를 두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멍하니 보다 흙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역전을 오가든 사람들의 별 일 없이 산다는 표정을 잊기 힘들다. 그때 알았다. 대추리는 그냥 섬이었다. 2006년의 그곳과 2009년의 칠괴동은 다를 게 없었다. 아버지는 렉스톤을 샀다. 파업 직전 쌍용차 영업을 하는 지인은 값싼 조건을 제시했고, 새 차 구입을 고민 중이던 아버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렉스톤을 타고, 오늘 복면을 쓰고 머리에 띠를 두른 사람들이 언젠가 작업복을 차려 입고 부품 하나하나 순서대로 조립해가며 렉스톤을 만들었을 그곳을 지나갔다. 점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세상에 또 한 번 두려움을 느끼며.

그해 여름은 가을, 겨울을 지나며 사라졌고, 파업이 끝난 뒤 쌍용차는 인도의 마한드라사에 인수됐다는 소식만 전한 채 별다른 뉴스거리가 못 됐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죽는다. 어제 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든간에, 삶이 가져다준 행운에 안도하는 나를 본다. 어쩌면 내 아버지, 내 형제였을 수 있다. 똑같이 10억분의 1의 확률로 시작해 부모를 만났고 형제를 가졌다. 그 엄청나게 작은 차이가 내게 가져다 준 행운은, 아버지는 쌍용차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 그래서 강제진압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고, 엄마를 허망하게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이제 아빠마저 잃은 그 아이처럼 마냥 웃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운이 좋다는 생각, 늘 한다. '아무리 사소한 성공도 빚지지 않은 것 없다'는 누군가의 말을 마음에 품고 살면서 조금이나마 자존감을 유지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으로 하루하루 지낸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과 이상을 떠나서 현실은, 너무 차갑고 끔찍해서 어지럽다. 결국 누군가는 사다리의 가장 윗편에 오를테고, 거기서 저 아래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두렵다. 그 어떤 사명감이나 정의감에 불타올라, 설익은 열기로 세상을 감당하려는 성향은 아니기에 단지 소박한 꿈과 희망으로 시작했던 일들이 갈수록 먹먹한 마음만 남긴다. 아직 순진해서 겁나고 마음이 무거운 걸까. 차라리 속물이 되면 나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운이 좋다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는 불운이라기엔 지나치게 가혹한 현실에 고장난 인형처럼 웃고 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