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우리는 별 다른 이유가 없으면 '민우슈퍼'에 간다. 아마도 아들의 이름을 따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의 그곳에 가는 시각은 대개 밤이다. 우리의 주된 구입품목이 주류와 과자 등등인 이유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광고를 뚫어져라 보는 그를 보며 웃은 적이 있는데, 텔레비전이 일상에서 사라진 후로는 나도 모르게 브라운관과 마주치면 그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여 우리는 민우슈퍼의 계산대 위에 맥주와 과자 등등을 주섬주섬 올려놓고, 우유 냉장고 위에 있는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본다. 이따금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지금 나오고 있는 프로그램(대개 드라마다)의 캐릭터를 가리켜 "저러면 안 되는데, 아휴 쟤는 지난 번에도 어쩌더니"란 설명을 한다. 검은 비닐봉지를 가득 채우고 나올 때까지 아주머니의 설명은 계속 된다.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에 인자한 미소를 보내주셔야 끝 맺는다.
어쨌든 그와 내가 주로 민우슈퍼를 가고, 이따금 말투가 특이한 아저씨(그 억양은 도저히 글로 설명할 수 없다)가 계산대를 지키는 이롬슈퍼, 그 다음으로 남양마트에 가는 이유는 정치적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음에도, 우리는 나름의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편의점을 전혀, 일절 이용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민우슈퍼다. 싸다. 텔레비전도 볼 수 있다. '대기업의 공세에서 재래시장과 동네슈퍼들이 살아 남는 데 기여한다'는 의미까지 있다. 그와 나의 몇 안 되는 '생활 정치' 중 하나다.
'삶은, 세상은 정치적이다'는 생각을 한 지 오래다. 하지만 점점 그 '정치적'인 것의 강도는 생각외로 크고, 생활의 영역에서 그걸 행동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는 생각은 더욱 확실해진다. 굳이 성향을 나누자면, 진보에 가까운 편이지만 그닥 선명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집회를 나가거나 후원을 하는 행동에는 이래저래 제약이 많다. '강성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을 만나면 짜증이 날 때도 빈번하다. 어쨌든 '진보'를 지향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현실로 변화하는 과정이 진보적 가치와 행동 덕에 가능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진보'를 지향하고 지지한다는 점에서 내가 갖는 딜레마 중 하나는 '커피'다. 얼마 전 한 모임을 스타벅스에서 했다. 당시 나는 스타벅스 다이어리 쟁취를 위한 스티커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였던 터라, 주최자에게 모임장소에 대한 의사를 살짝 내비쳤다. 모임 후 스타벅스를 나서며 그는 내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다른 곳에서 모여도 되죠?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 시오니스트들에게 수입이 돌아가서요." 그 직전 지인의 트윗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기도 했다. 세계적인 규모의 커피체인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탄압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무리의 물적 지지세력이라니, 그것도 스타벅스가 말이다.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스타벅스에 앉아 있다. 심지어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내가 쓴 8700원 중 얼마가 시오니스트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가게 될까. 생각해 봤다. 사실 발에 채일만큼 널린 게 커피 전문점이다. 오래 앉아서 버틸 큰 장소를 찾았다고 해도 당장 근처에는 3층짜리 커피빈도 있다. 그럼 나는 왜 스타벅스에 앉아 노트북에 이 글을 끄적이고 있는가? 첫째, 노트북 콘센트를 꽂을 수 있다. 둘째, 무선 인터넷을 공짜로 쓸 수 있다. 셋째, 여기가 익숙하다. 넷째, '시오니스트 지원'설(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것이므로 나는 설 hypothesis라 하겠다)을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다. 물론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도 중요하다. 실제로 이 근처에 있는 커피빈에선 노트북 콘센트를 꽂을 수 없고, 인터넷도 사용 불가하다.
스타벅스가 주는 편리함, 차별화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내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건, 그냥 습관이다. 커피빈이나 할리스, 탐앤탐스 등 다른 체인보다 스타벅스에 엉덩이를 쑤시고 앉아 있던 시간이 훨씬 많다. 롤러코스터 노랫말처럼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다. 설령 시오니스트 지원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때문에 '스타벅스 절매'를 선언하거나 행동에 옮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 누군가 말하겠지. 니가 '진보를 지향한다면 습관과 단절하고, 스타벅스를 거부해야 한다'고 그게 아니면 '가짜 진보'라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행일치(言行一致)는 지식인의 기본이자 필수라고 말이다. 너 역시 신자유주의에 길들어져 버린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민우슈퍼를 가고 스타벅스도 가는 나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자아인가. 말만 뻔지르르한 진보인가. 잘 모르겠다. 회피의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은 늘 남는다. 민우슈퍼와 스타벅스 중간에 서 있는 내 모습은, 그 의구심이 생활에서 나타나는 사례다. 비판받을 수 있지만, 사실 비슷한 딜레마를 겪는 이들이 다수가 아닐까. 머리에 박힌 정치적 올바름이 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홍대 문제는 그 딜레마의 극단적인 예였다. 누구나 약자는 도와야 한다고 유치원에서부터 배운다. 하지만 청소노동자들의 해고 항의 시위가 학업에 방해가 된다며 나가달라고 했다. 그들은 괴물도 악마도 아니었다. 다만 딜레마를 딜레마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과 '일상'을 고민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고민을 한다고 다를까? 예전엔 그렇다고 믿었다. 주변에 워낙 세상 만사에 무심한 이들이 많아서였는데, 세상 만사에 관심 많은 이들을 자주 보는 지금은 그 차이를 모르겠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말과 행동의 모순을 목격하는 순간이 잦게 찾아온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정치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 말이 주는 선명함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하는 자아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는 모양새다. 물론 이 단계를 초월하는 경지에 오르면, 그의 말대로 신영복 선생님 정도가 된다면 꽤 대단하고 멋진 일이 될텐데 아직 먼 일이다. 다만 무턱대도 선명하기 보다는, 그래서 지나치게 자기확신에 차기보다는 지금 갖고 있는 의구심, 주저함을 간직하고 싶다. 적어도 '인생은 모순'이라는 명제에서 도망치고 싶진 않으니까. 이 글은 모순투성이 인생에 대한 고민, 편협함에 대한 거부를 다짐하는 지금의 기록이다.
어쨌든 그와 내가 주로 민우슈퍼를 가고, 이따금 말투가 특이한 아저씨(그 억양은 도저히 글로 설명할 수 없다)가 계산대를 지키는 이롬슈퍼, 그 다음으로 남양마트에 가는 이유는 정치적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음에도, 우리는 나름의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편의점을 전혀, 일절 이용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민우슈퍼다. 싸다. 텔레비전도 볼 수 있다. '대기업의 공세에서 재래시장과 동네슈퍼들이 살아 남는 데 기여한다'는 의미까지 있다. 그와 나의 몇 안 되는 '생활 정치' 중 하나다.
'삶은, 세상은 정치적이다'는 생각을 한 지 오래다. 하지만 점점 그 '정치적'인 것의 강도는 생각외로 크고, 생활의 영역에서 그걸 행동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는 생각은 더욱 확실해진다. 굳이 성향을 나누자면, 진보에 가까운 편이지만 그닥 선명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집회를 나가거나 후원을 하는 행동에는 이래저래 제약이 많다. '강성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을 만나면 짜증이 날 때도 빈번하다. 어쨌든 '진보'를 지향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현실로 변화하는 과정이 진보적 가치와 행동 덕에 가능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진보'를 지향하고 지지한다는 점에서 내가 갖는 딜레마 중 하나는 '커피'다. 얼마 전 한 모임을 스타벅스에서 했다. 당시 나는 스타벅스 다이어리 쟁취를 위한 스티커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였던 터라, 주최자에게 모임장소에 대한 의사를 살짝 내비쳤다. 모임 후 스타벅스를 나서며 그는 내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다른 곳에서 모여도 되죠?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 시오니스트들에게 수입이 돌아가서요." 그 직전 지인의 트윗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기도 했다. 세계적인 규모의 커피체인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탄압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무리의 물적 지지세력이라니, 그것도 스타벅스가 말이다.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스타벅스에 앉아 있다. 심지어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내가 쓴 8700원 중 얼마가 시오니스트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가게 될까. 생각해 봤다. 사실 발에 채일만큼 널린 게 커피 전문점이다. 오래 앉아서 버틸 큰 장소를 찾았다고 해도 당장 근처에는 3층짜리 커피빈도 있다. 그럼 나는 왜 스타벅스에 앉아 노트북에 이 글을 끄적이고 있는가? 첫째, 노트북 콘센트를 꽂을 수 있다. 둘째, 무선 인터넷을 공짜로 쓸 수 있다. 셋째, 여기가 익숙하다. 넷째, '시오니스트 지원'설(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것이므로 나는 설 hypothesis라 하겠다)을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다. 물론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도 중요하다. 실제로 이 근처에 있는 커피빈에선 노트북 콘센트를 꽂을 수 없고, 인터넷도 사용 불가하다.
스타벅스가 주는 편리함, 차별화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내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건, 그냥 습관이다. 커피빈이나 할리스, 탐앤탐스 등 다른 체인보다 스타벅스에 엉덩이를 쑤시고 앉아 있던 시간이 훨씬 많다. 롤러코스터 노랫말처럼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다. 설령 시오니스트 지원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때문에 '스타벅스 절매'를 선언하거나 행동에 옮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 누군가 말하겠지. 니가 '진보를 지향한다면 습관과 단절하고, 스타벅스를 거부해야 한다'고 그게 아니면 '가짜 진보'라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행일치(言行一致)는 지식인의 기본이자 필수라고 말이다. 너 역시 신자유주의에 길들어져 버린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민우슈퍼를 가고 스타벅스도 가는 나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자아인가. 말만 뻔지르르한 진보인가. 잘 모르겠다. 회피의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은 늘 남는다. 민우슈퍼와 스타벅스 중간에 서 있는 내 모습은, 그 의구심이 생활에서 나타나는 사례다. 비판받을 수 있지만, 사실 비슷한 딜레마를 겪는 이들이 다수가 아닐까. 머리에 박힌 정치적 올바름이 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홍대 문제는 그 딜레마의 극단적인 예였다. 누구나 약자는 도와야 한다고 유치원에서부터 배운다. 하지만 청소노동자들의 해고 항의 시위가 학업에 방해가 된다며 나가달라고 했다. 그들은 괴물도 악마도 아니었다. 다만 딜레마를 딜레마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과 '일상'을 고민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고민을 한다고 다를까? 예전엔 그렇다고 믿었다. 주변에 워낙 세상 만사에 무심한 이들이 많아서였는데, 세상 만사에 관심 많은 이들을 자주 보는 지금은 그 차이를 모르겠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말과 행동의 모순을 목격하는 순간이 잦게 찾아온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정치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 말이 주는 선명함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하는 자아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는 모양새다. 물론 이 단계를 초월하는 경지에 오르면, 그의 말대로 신영복 선생님 정도가 된다면 꽤 대단하고 멋진 일이 될텐데 아직 먼 일이다. 다만 무턱대도 선명하기 보다는, 그래서 지나치게 자기확신에 차기보다는 지금 갖고 있는 의구심, 주저함을 간직하고 싶다. 적어도 '인생은 모순'이라는 명제에서 도망치고 싶진 않으니까. 이 글은 모순투성이 인생에 대한 고민, 편협함에 대한 거부를 다짐하는 지금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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