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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 이야기

사상 최악의 감기를 앓으며

사상 최악의 감기를 앓고 있다. 어제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로 열이 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오늘은 오한까지 났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조퇴. 덜덜덜 떠는 몸을 간신히 병원까지 데려다 놨다. 콧물, 기침, 발열에 오한까지 감기 증상은 종합세트로 갖춘 내게 의사는 우선 '급성 편도염' 처방을 내리겠다고 했다.

문제는, 3일 정도 지난 후에도 차도가 없으면 독감이거나 신종플루일 수 있다는 것. 신종플루는 아직 의료보험 대상이 아니라 검사비만 10여만원 든다는데 딱 질색이다. 돈이 없으면,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 그나마 공공보험이 잘 되있는 편인 나라이지만, 같은 감기로 왔어도 다른 사람이랑 나랑 진료비는 몇 천원 차이나더라. 이 작은 차이가 더 큰 질병 앞에선 몇 십, 몇 백만원이 되겠지.

손미아 강원대 교수(예방의학)가 2008년 작성한 '암 발생과 사망의 건강 불평등 감소를 위한 역학지표 개발 및 정책개발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월소득 100만~228만원의 중·하위 계층의 암 발생위험비는 월소득 335만원 이하 최상위 계층보다 크게 낮지만, 사망 비율은 정반대였다. 최상위 계층이 암으로 100명 사망할 때, 월소득 100만원 이하 계층은 160명 사망한다. 이미 암에 걸린 환자들 사이에서도 계층별로 생존한 기간이 다르다. 최상위 계층이 암에 걸리고 난 뒤 5년 동안 100명이 사망하는 동안, 하위 계층은 125명, 의료급여 대상(월 수입이 최저생계비 이하)은 147명 사망했다. 가난한 자에게 암이 조금 멀리 있을지 몰라도, 가난한 암환자에게 죽음은 조금 더 가까이 있다. [참고 : 한겨레 21 840호, 암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



한겨레21 840호 암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



몇 년 새 부쩍 부모님의 병원나들이가 잦아지고 있다. 2008년이었던가, 어머니는 암환자들과 한 병실을 썼다. 양성종양인지라 제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무서웠다. 어두컴컴한 병실에선,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이가 암을 앓고 있었다. 죽음이 성큼 다가온 것 같은 병실에서 두 가지 사실에 안도했다. 어머니가 암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치료비가 굉장히 많이 들진 않는다는 것에 말이다. 무릎과 허리, 목, 치아 등으로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는 요즘, 아버지는 "보험 안 됐으면 절대 (치료) 못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유가 있거나 풍족하진 않지만, 적어도 아프면 무조건 참는 게 아니라 병원에는 갈 수 있고 몸에 좋은 약이나 건강식품 하나쯤 챙겨 먹을 형편이 된다는 게 꽤 큰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불평등이 만성화된 사회다보니, 건강 불평등(Health Inequality)쯤은 주목받는 문제가 못 된다. 잘 먹고, 잘 사는 일들에 잘 치료받거나 잘 죽는 일들은 묻혀버린 느낌이다. 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국가보건의료서비스(NHS)를 갖춘 영국은 이미 1970년대부터 건강 불평등(보수당 집권기에는 '건강 차이(Variation)라고 했으나 1997년 다시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불평등'이란 표현을 사용)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사회 공식 의제로 채택했다. 그럼에도 건강 불평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를 쓴 리처드 월킨슨이라는 학자는 소득 분배와 건강 불평등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며 "불평등한 사회는 저소득층뿐 아니라, 그 사회 전체의 건강 수준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공공보험이 잘 갖춰진 영국이 이 정도인데,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얼마나 뿌리 깊은 건강 불평등이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지 마이클 무어의 <식코>에서 이미 충분히 목격했으니까.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라임이 주원에게 "삼신할매 랜덤으로 금수저 물고나왔다"고 말한 정도는 아니지만, 4200원을 내고 진료 받은 다음 5110원으로 3일치 감기약을 구입할 수 있는 처지임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이 모든 불평등이 온전히 사라질 수야 없겠지만 얼마나 나아질 수 있는 걸까. 감기 때문에 어지러운 줄 알았는데, 꼭 그것만은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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