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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원망도 했지만…너무 아까워"

노무현을 보내는 평택, 대추리 사람들[2009.5.27 오마이뉴스]

▲ 평택역 앞 광장에 설치된 시민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절하고 있는 모습 ⓒ 박소희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 지난 2006년 5월 4일, 미군 부대 확장에 반대하면서 마을을 지키려던 사람들은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포위됐고, 포크레인이 지나간 자리엔 무너진 대추초등학교의 잔해만 남았다. 그 때 청와대와 국방부 앞을 문턱이 닳을 정도로 찾아가 항의했던 대추리 사람들은 "그때 대통령이 미안하단 말 한마디 했다면…" 하는 여한을 안고 있었다.  

원망도 할 법 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들은 맺힌 마음을 풀었다. 이주민들의 임시거처인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송화리의 '대추리 마을회관'에 모여 있던 할머니들은 "불쌍하고 안됐다"고 입을 모았다.

"곧고 민주화에 힘 쓴 사람이었지. 원망도 몇 천 번 했는데, 그래도 불쌍해. 죽지 말고 살아서 해결했어야지."

한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이자, 옆에 있던 다른 할머니가 거들었다.

"잘했든 못했든 큰일 한 사람인데 너무 아까워. 대추리에 있을 땐 엄청 욕도 했지만…난사람이었어. 그때 일은 그때 일이고 아까운 사람이야."

옆에 앉아 있던 송재국(72) 할아버지도 "우리가 설움 겪을 땐 싫었고 욕도 나오고…그런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됐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대추리 주민들의 마음이 '안타까움'이라면, 평택역 앞 광장에 설치된 시민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의 마음은 '슬픔'이란 두 단어가 대신하고 있었다.

26일의 태양은 유난히 강했다. 그 열기만큼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추모 열기 또한 뜨거웠다. 전날 막 설치된 분향소에는 이틀 동안 약 4천명이 다녀갔다.

▲ 밤늦도록 추모 행렬은 계속 됐다. ⓒ 박소희



고등학생 방소라 양은 "어제도 오고 오늘 또 왔다"며 "영정사진이 쓸쓸해 보여서 마음에 걸렸다"고 말했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분향소를 찾은 부모들도 많았다. 두 딸과 함께 헌화, 분향한 뒤 나오던 김순희(35세, 안성)씨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아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함께 기도해주고 싶었어요. 지금은 우리 민주주의에 아픔이 있지만 성숙해지고 상생하는, 더 나은 민주주의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분의 죽음이 그저 지나가는 과거가 아니라 정치권이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해요. 이렇게 보내선 안 되잖아요…."

해가 지고 바람이 불었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늘어났다. 추모행렬은 대한문이나 봉하마을과는 비교도 안 되는 3~4m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끊이질 않았다. 학생과 청년들은 조문 자체가 어색해 절을 하면서 옆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모두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분향하는 가족도 있었고, 말없이 조문객들과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50대 조 모씨는 조문 행렬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택은 개방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론 굉장히 보수적인 도시입니다. 그래서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시민들이 이렇게 분향하는 걸 보고 '아직 의식이 죽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두가 위선을 깨닫고 진실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향내음이 짙어졌다. '노무현'이란 한 사람이 떠난 곳에는 그를 그리워하고, 그가 남긴 우리 사회의 과제를 되새기는 '사람들'이 남았다. 과거의 원망을 잊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추모곡 노랫말처럼 '밝은 해가 뜨는 그날 우리 다시 만나자'고 기원하는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