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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사람들은 떠났고


이제는 이 불편한 의문과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자칫 그들의 죽음을 폄하하는 것으로 매도될까 입을 닫았던 두려움을 털어내야 한다. 3월26일 밤 9시20분께 천안함은 통상적인 초계활동 중이었고, 근무가 끝난 승조원들은 가족, 친구, 애인과 통화 혹은 문자를 하거나,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체력단련을 하거나, 근무를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고 있었다. 폭발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숭고한 애국심을 온몸으로 보여줄 자세도 아니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하다못해 자위 차원에서 몸부림칠 겨를도 없었다. 그들은 참혹한 희생자였다.

설사 정부와 군, 보수언론이 추정하듯이 북쪽 중어뢰의 버블제트로 말미암은 사고라 하더라도, 그들이 비명에 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적이 후방 깊숙이 침투하도록 무방비였던 경계태세, 어뢰가 배 밑에서 터질 때까지 작동하지 않은 음향탐지기 등 엉망진창인 방어체계, 침몰 뒤 사흘이 지나도록 침몰한 선체를 찾지 못한 총체적 부실 등 군 통수권자의 안보 무능력만 드러낼 뿐이다. 첨예한 대결정책으로 이런 사태를 초래한 이 정권의 정책적 실패만 부각시킬 뿐이다.


정부의 펼침막은 이렇게 다짐한다. ‘대한민국은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다, 꼭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할 건 영웅신화가 아니라, 원통한 죽음의 진실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 터무니없는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고, 하루에도 열두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군 장병의 부모들도 안심시킬 수 있다. 그래야 “엄마가 군대 가라고 해서 미안하다”라는 한 유가족의 울부짖음도 이번으로 그친다.

곽병찬 <한겨레> 편집인, '영웅신화, 그건 아니다' 중에서

요즘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고 있고, 그 전엔 휘리릭 훑어본 수준이지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강한 국가의 조건>을 봤다. 천안함 침몰로 나라 안팎이 뒤숭숭했던 요즘, 우연히도 나는 '국가'와 관련된 책들을 읽어온 거다.
 
국가란 무엇인가? 천안함이 두동강 난 채 차가운 백령도 앞바다 밑으로 가라 앉은 후 연일 사람들은 물었다. 진보든 보수든 할 것 없이 국가의 무능력함, 구멍난 안보체계를 비판했다. 동시에 천안함의 희생자들은 '영웅'이 됐다.

불편했다. 까닭모를 불편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처럼. 그때도 그랬다. 그의 죽음은 내가 겪은 그 어떤 비극보다 처절했고,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슬픔과 별개로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신은 진정한 대통령이었습니다, 뒤늦게 알아 정말 죄송합니다'류의 발언이 쏟아지고 눈물이 넘쳤다. 부엉이 바위 위로 날아가버린, 그 슬픈 결말과는 별개로 영웅이 되어가는 그의 일생을 나는 속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출근길 여의도 공원에서 오색빛깔 편지로 채워진, '천안함의 영웅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란 글씨가 또렷한 종이벽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갑갑했다. 그건 슬픔을 앞선 불편함이었다. 영웅 없는 세상은 신화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들은 영웅이 아니다. 소소한 일상에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에 희생된 사람들일 뿐이다.

오랜만에 곽병찬 편집인님의 칼럼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