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매모호하고 정확한

0416

평소 택시를 잘 타지 않는다. 술 먹고 밤늦게 들어갈 때가 아니라면, 교통수단은 90% 이상이 지하철 또는 버스다. 그런데 오늘은 급히 이동할 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다. 봄날인데 비는 꼭 장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유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그날'이었다. 


1년 전 오늘, 나는 그토록 타지 않는 택시를 탔다. 서울 시내에서 이동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서초동에서 단원고로 가야했다. 처음 속보가 떴을 때는 '설마 설마'하는 마음이 컸다. "지금 퇴선방송이 나왔답니다"란 앵커의 멘트에 안심하기도 했다.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500명 가까이 탄 여객선에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으니까.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투덜대며 YTN 화면을 확인하고 있던 택시 속에서 차창 너머로 본 하늘은 흐렸다. 오늘은 흠뻑 젖어있었다.


학교는 어수선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는 선생님의 말을 뒤로 교문을 나선 아이들도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교문 앞에서 만난 여학생 둘은 동아리 선배들이 수학여행을 갔다는데 어떡하냐며 발을 동동 굴렸다. 직업이 뭐라고 나는 그 아이들에게 카톡창을 좀 볼 수 있냐고, 캡쳐본을 받을 수 있냐고 물었다. 하나라도 잡아둬야 했다. 그런 마음으로 체육관에 들어섰다. 


생각보다는 차분했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었다. 엄마 아빠들은 그저 두 손을 모으고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제발, 제발… 이라는 말만 끝없이 되풀이하며. 11시를 조금 넘겨 체육관에 도착했던 나는 어리둥절한 채 그들을 보고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 2분, 단원고


그때 선배들에게서 연달아 카톡이 왔다. "전원 구조라는데 확인 가능하니?" "사진팀은 안 간다, 전원 구조라니 다행"이란 내용이었다. 아직 '전원 구조' 자막을 보지 못했던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확인해보겠습니다"라고 답한 뒤 주변을 둘러보던 찰나 환호성이 쏟아졌다. 11시 22분경 SBS 뉴스였다고 기억한다. 드디어 나도 봤다. '전원 구조'라는 그 네 글자를. 하지만 부모들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환호보다 컸던 것은 의심이었다. 몇몇은 무대 쪽으로 올라가 "저걸 어떻게 믿냐, 아니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냐고 항의했다. 


평소 같았다면, 여느 날처럼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자막을 의심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그들의 의심이 터무니 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몇 시간 뒤 그 의심은 사실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슬픈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팽목항에, 그 통곡의 땅에 나는 있지 않았다. 첫 날의 단원고는 안타까움이 넘쳐흘렀지만 감당할 수 없는 현장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감당하지 못했다. 그냥 서 있었다. 바보 같이. 들리는 이야기들을 주워담느라 바빴다. 


첫 사망자 소식에 아이의 책상을 찾느라 정신 없이 움직이는 다른 기자들을 쫓아다니느라 멍했다. 시시각각 숫자가 바뀌어가던 순간, 나는 단원고 교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학교에서 이런 것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느냐고. 죄인마냥 어두운 얼굴로, 쫓기는 사람마냥 기자들에게 시달리던 그가 방금 수백명의 제자를 한꺼번에 잃은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은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뒤늦은 부끄러움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또한 뒤늦은 변명이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단원고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학부모를 만난 것은, 팽목항에 선 것은 5월 1일의 일이었다. 취재보다는 TF 기획을 위해 분위기를 한 번 보러간 터라 부담이 없었다. 바다를 향해 울부짖는 엄마 아빠들 옆에 서 있는 일도 예상보다 감당할 만했다. 거리를 둘 수 있어서, 그 감정에 휩싸이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휩싸이고 싶지 않았다. 


세월호 TF라 다행이다 싶었다. 유족이 아닌 재판을 취재해야 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분노라는 단어를, 슬픔이란 단어를 두 눈과 귀로,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껏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주절거린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나는 안다. 자신이 없었다. 피하고 싶었다.


'4월 16일 세월호 : 죽은 자의 기록, 산 자의 증언'에 이어 '아이들의 방'이라는 또 다른 세월호 기획에 참여한 일은 어쩌면 그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직시하지 못한다는 부끄러움을, 정말 거리를 둔 사람, 대단한 기록자인 시늉을 해서라도 감추고 싶었다. 지난 1년간 울지 않고, 덤덤하게 그날과, 우리의 무능과 실패를 기록하면서 나는 그렇게 위선을 떨었다. 굳이 유족들에게 다가가지 않아도, 그들의 모든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아도 내 몫을 할 수 있다면서 나는 그렇게 합리화했다. 


2014년 4월 16일 오후 9시 1분, 단원고.


그런데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잘 모르겠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가 첫 번째고, 그런 사람들 옆에 주저 앉아 함께 울어줄 자신이 없다는 이유가 두 번째다. 잘 울지도 못한다. 2014년 4월 16일부터 2015년 4월 16일까지 세월호 취재를 하며 눈물 흘린 날이 없다. '아이들의 방' 기획 기간에도 비슷했다. 참사 후 형 꿈에 나타나 "휴대폰이 젖어서 답장을 못했다"고 했다는 웅기 이야기를 정리할 때는 울컥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는데, 좀 더 시간이 흐른다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은 청계광장 근처의 한 카페에서 쓰고 있다. 바로 옆 광화문광장에는 엄마 아빠의 천막과 빈 방 사진들이 있다. 시청광장에선 추모 문화제가 한창이다. 나는 조용히 길을 돌아가 500번 버스를 탈 생각이다.


'집회 방식이 촌스러워, 공감이 안 된다'는 것보다 큰 이유는, 여전히 나는 그 옆에 설 자신이 없어서다. 직시할 자신이 없어서다. 이 모든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록하는 것뿐일 테니. 겨우 1년이 지났으니까...




'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살은 돋겠지만  (0) 2015.09.02
법원은 자꾸 믿어달라고만 하는데...  (0) 2015.08.25
탓과 덕  (0) 2015.03.14
다시, 세월호  (0) 2015.01.01
어떤 2년  (0) 2014.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