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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재구성]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http://www.hani.co.kr/arti/SERIES/418/548808.html


[무죄의 재구성 - 노숙소녀 살인사건] ① 자백



2007년 5월14일 새벽, 경기도 수원시 매교동 수원고등학교 본관 건물 앞에서 신원미상의 15살 소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나중에 가출 청소년으로 밝혀졌지만, 낡은 옷차림 때문에 ‘노숙 소녀’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날 저녁 경찰은 수원역 대합실에서 지내던 20대 노숙인 2명을 ‘노숙 소녀’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체포했다. 다음해인 2008년 1월, 검찰은 ‘공범’이라며 10대 노숙 청소년 5명을 추가로 잡아들였다.


형사 미성년자였던 노숙 청소년 1명을 제외한 6명이 기소됐으나, 5년이 지난 지금 이들 모두 무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10대 청소년 4명은 2010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처음 체포된 20대 노숙인 가운데 1명은 벌금 200만원 형만 받고 풀려났다. 주범으로 5년 징역형을 확정받았던 또다른 노숙인은 지난 2일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는데, 최근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다”는 취지로 재심을 결정했다.


이들 모두 자기변호 능력이 없는 가출 청소년, 노숙인, 심신미약자였다. 경찰과 검찰은 이들의 자백에만 의존해 무리하게 수사하여 기소했다. 지난 6월부터 두달 동안, 1000여쪽의 수사·재판 기록을 검토하고 10여명의 사건 관계자를 인터뷰했다. 이를 토대로 재구성한 5년여의 수사·재판 과정은 한국 형사사법제도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난 8월2일 밤 12시, 송인철(가명·34)씨는 경기도 어느 교도소 문을 나섰다. 시커먼 어둠 속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노숙인 보호시설 직원과 국선변호사 박준영(38)씨였다. 두 사람은 하얀 두부를 건넸다. 송씨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들보다 판단이 더딘 송씨는 지난 5년여 동안 벌어진 일을 세세히 이해하지 못한다. 교도소에서 5년을 보낸 송씨의 거처는 이날 밤부터 수원에 있는 노숙인 보호시설로 바뀌었다.


5년여 전, 송씨의 거처는 수원역이었다. 2007년 5월14일 저녁, 형사들이 그를 경찰서에 끌고 갔다. “거짓말하지 마. 너 사람 때려서 죽였잖아.” 형사가 손등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치며 그렇게 다그쳤다고 송씨는 나중에 법원에 낸 탄원서에 썼다.


사람을 죽인 일이 있는지 송씨는 아무래도 기억에 없었다. “아니에요. 저 안 죽였어요.” 형사가 서류철로 책상을 내리칠 때마다 당시 29살이었던 송씨는 가슴이 졸아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에서 친구 나주용(가명·당시 29살)씨가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조사받고 있었다.


이날 저녁, 나씨는 여느 때처럼 수원역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형사가 나씨를 찾았다. “가자, 가보면 안다.” 차에 올라탄 뒤 형사가 캐물었던 내용을 나씨는 나중에 법정에서 증언했다. “나주용이 너, 사람 때리고 죽였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본 적은 있다. 사람을 때린 적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죽였다니. 나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얘들이 너랑 송인철이 여자애 때리는 걸 봤다고 했어. 거짓말 마라.” 형사는 수원역에서 어울려 다니는 노숙인들의 사진 몇 장을 꺼내 보여줬다. 나씨는 남들보다 지능이 떨어졌다. 나씨는 형사들의 추궁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씨가 친구 송씨와 함께 누구를 때린 것은 사실이었다. 둘은 이틀 전 다른 일행과 함께 수원역 대합실에서 노숙하는 어느 20대 여성을 주차장으로 데려가 손 가는 대로 쥐어박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죽었단 말인가?


죽은 피해자라며 형사가 내민 사진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사진 속 앳된 소녀는 송씨 등이 때렸던 20대 여자와는 달랐다.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송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형사가 서류철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고 송씨는 나중에 법정에서 증언했다. “네가 죽였잖아! 이 새끼, 거짓말쟁이네.”


나씨는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었다. 간신히 초등학교를 나왔지만 끝내 한글은 깨치지 못했다. 고물을 주워 생활하던 나씨는 2004년 절도죄로 2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감방생활을 할까 두려웠다. 결국 나씨는 경찰이 원하는 진술을 내놓았다. “(송)인철이랑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여자애를 학교로 끌고 가서 때렸어요. 나는 먼저 나왔고 인철이가 끝까지 있었어요.”


이 진술은 이후 5년여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을 결정해버렸다. 나씨의 자백이 있은 뒤, 송씨도 범행을 자백했다. 나중에 송씨는 “주용이가 진술해서 나도 진술했다”고 변호사에게 말했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나씨가 “(송)인철이가 죽인 것 같다”고 말한 뒤부터 빠져나갈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알리바이를 대려 해도 전날 밤 수원역에서 함께 술 마신 노숙인들의 이름조차 송씨는 기억해낼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체포 5시간 만에 범행 일체를 자백한 셈이 됐다. 송씨와 나씨의 기억, 국선변호사의 증언, 그리고 법정·수사기록 등을 종합하면, 나씨와 송씨는 범행을 자백했다 번복하고 다시 자백하길 거듭했다. 그러나 그날 밤, 경찰은 두 사람의 ‘마지막 진술’만 신뢰했다. 나씨가 송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송씨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소녀를 ‘무차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해 12월 서울고등법원은 주범으로 지목된 송인철에게 상해치사 혐의로 징역 5년형, 공범 나주용에게 벌금 200만원 형을 각각 선고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② [회유] “나가게 해줄게” 형사의 구슬림에 넘어갔다

③ [반전] 처음엔 노숙인의 범행이라더니, 이제는 가출 10대가 ‘진범’이라고…

④ [조작] 울면서 “결백” 외치자 검사 “너 연기 잘한다”

⑤ [호소] “쌤만은 저를 믿어주세요” 한통의 편지

⑥ [증거] “인철이도 아이들도 그 고등학교에 간 적 없다”

⑦ [원점] 경찰이 5년간 감춘 ‘무죄 증거’를 찾다

⑧ [상흔] 누명씌워 7명의 삶 뒤흔든 이들은 건재했다

⑨ [숙제] 밟혀도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보호막은 없었다

'수원 노숙소녀 살해' 재심서 7번째 무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