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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몇 가지/조금만 더

<한겨레21> : 살인죄 기소, 고의성 증명될까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208.html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면 ‘살인죄’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선장 이준석씨와 1등 항해사 강원식(43)씨, 2등 항해사 김영호(47)씨, 기관장 박기호(54)씨 등에게 검찰이 살인죄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살인죄가 성립되려면 ①인명을 구호할 의무가 있고 ②용이하게 구호할 수 있는 상황이며 ③범죄 결과가 생길 것을 인식하는 고의성이 있어야 한다. 첫째, 둘째 요건은 증거가 충분하다. 첫째, 이 선장 등 4명은 선원법 등에 의해 승객을 구호할 의무가 있었다. 선원법(제11조)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인명과 선박, 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해야 한다”고 돼 있다. 둘째, 사고 초기부터 퇴선 때까지 1시간 가까이 얼마든지 대피 명령을 할 수 있었다. 일부 선원이 숙소로 돌아가 휴대전화를 가져오거나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이동도 가능했다. 게다가 세월호 구명벌(구명뗏목) 정원 수가 승객보다 많았고, 인근 어선과 해경 경비정 등이 구조를 위해 잇따라 도착하는 상황이었다. 퇴선 명령만 했다면 충분히 승객을 구조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선원들의 대기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인 특정 객실에서 생존자가 많이 나왔다는 점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문제는 피고인의 내심을 따지는 셋째 조건, 곧 고의성 여부다. 과거 대형 참사에서 법정 최고형이 5년인 업무상 과실치사죄가 적용된 것도 고의성의 문턱을 넘지 못해서였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대표적이다. 사망 471명, 실종 31명, 부상 718명이 발생한 대형 참사였다. 당시 검찰이 만든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종상 변호사가 쓴 ‘살인죄에 있어서 미필적 고의’ 논문을 보면 이렇다. 붕괴 위험이 존재했다는 점은 객관적으로 입증되지만, 삼풍백화점 회장과 사장이 붕괴 위험을 인식하고 이를 용인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건물이 붕괴할 때까지 이준 회장 등이 백화점 안에 있었고, 이 회장의 큰며느리도 백화점 지하 1층에서 점포를 경영하다 붕괴 뒤 구조됐기 때문이다. 결국 검찰은 살인죄 대신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이 회장을 기소했고 징역 7년6개월형이 확정됐다.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해상 사고인 ‘남영호 침몰 사건’에서는 검찰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사망을 불러온 죄)를 적용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0년 12월 제주 성산포를 출발해 부산으로 가던 남영호는 전남 여천 소리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당시 남영호는 기준치(130t)의 4배가 넘는 543t의 화물과 정원을 110명 초과한 승객을 태우고 있었다. 이 사고로 321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검찰은 강아무개 선장을 살인죄로 기소했다. 검찰의 주장은 이랬다. “선장은 과적으로 출항을 거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위험을 절감하면서 풍랑이 일지 않을 것에만 기대를 걸고 운항했다. 이는 법률상 위험 발생의 가능성을 예견했으므로 미필적 고의가 성립된다.” 하지만 법원은 “선장이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사고 발생을 예견하면서까지 과적 운항을 했을 까닭이 없다”고 판단했다. 살인죄의 요건 중 고의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선장은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선원들의 고의성, 부작위는 남영호 사건 때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과적 운항했을 뿐 아니라 사고 이후 승객 구호 조처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승객이 단체로 퇴선할 경우 구조가 뒤로 밀릴까봐 선원이라는 신분을 감춘 채 가장 먼저 탈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선원들은 자신들이 먼저) 퇴선하면 선내에 대기하고 있던 승객 등이 세월호가 침몰할 때 선내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묵시적 교감이 있었다. (그래서) 승객들에 대한 구호 조치 없이 자신들만 퇴선했다.” 검찰이 공소장에서 살인죄를 적용하며 밝힌 논거다.


과거 대형 참사에서는 유일하게 전북 이리역(현 익산역) 열차 폭발 사고 당시 관계자들이 ‘할 일을 하지 않은 죄’로 처벌받았다. 1977년 1월11일 밤 9시께 한국화학 호송원 신아무개씨는 동인천역에서 출발해 광주로 가는 길에 이리역에서 멈춰 열차를 대기시켰다. 그는 역 앞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와 열차 안에 촛불을 켜고 잠들었다. 초가 다 탄 뒤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불이 옮아붙는 순간 그는 깨어났다. 침낭으로 불꽃을 몇 번 두드렸지만 진화되지 않자 신씨는 열차 문을 열고 혼자 밖으로 도망쳤다. 그 결과 열차에 있던 화약 1139상자(27.3t)가 폭발해 50여 명이 사망하고 1천여 명이 다쳤다. 이 사고로 이리시 1만3천 가옥 가운데 9천여 동이 무너지거나 유리창이 깨지는 등 피해를 입었고 1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당시 검찰은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로 기소했다. 법원은 “피고인은 침낭으로 불을 끄거나 불붙은 상자를 열차 밖으로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불을 방치하면 화학류가 한꺼번에 폭발하리라는 것을 예견하면서도 밖으로 도주했고 결국 불이 커졌다”며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법원에서 인정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대법원 판례를 검색해보면, 1992년 저수지에 빠진 조카를 구하지 않은 삼촌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이 유일하다. 삼촌과 저수지로 놀러간 10살, 8살 조카는 인적이 드물고 경사가 가파른 제방을 걸었다. 이때 10살 조카가 미끄러져 저수지에 빠졌다. 수심이 2m로 꽤 깊었다. 하지만 삼촌은 첫째 조카를 구하기는커녕 앞서 걷던 둘째 조카까지 소매를 잡아당겨 저수지에 빠뜨렸다. 대법원은 “삼촌이 조카를 살해하려고 애초에 저수지로 데려갔다”고 판단했다. “삼촌인 피고인은 피해자(조카)가 물에 빠져 익사할 위험을 방지하고 피해자가 물에 빠졌을 경우 그들을 구호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 하지만 10살 조카가 빠졌을 때 구호하지 않고 익사를 방관한 행위(부작위)는 조카를 직접 물에 빠뜨려 익사시킨 행위와 다름없다.”(1992년 2월11일 대법원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