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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밑줄을 긋다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1장 어린 새

17쪽)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를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24쪽) 볕이 나른하던 5교시에 식물의 호흡에 대해 배웠던 게 다른 세상의 일 같다. 나무들은 하루에 딱 한차례 숨 쉰다고 했다. 해가 뜨면 길게 길게 햇빛을 들이마셨다가, 해가 지면 길게 길게 이산화탄소를 내쉰다고 했다. 그토록 참을성 있게 긴 숨을 들이쉬는 나무들의 입과 코로, 저렇게 세찬 비가 퍼붓고 있다. 그 다른 세상이 계속 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42쪽) 여섯시에 여기 문 닫은대요 엄마.

행렬 사이로 너와 눈을 맞추려고 엄마가 깨금발을 디딘다. 우는 아이처럼 힘껏 찡그린 그녀의 이마를 향해 너는 목소리를 높인다.
문 닫으면 나도 들어갈라고요.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2장 검은 숨

50쪽)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눈이 없는데 어디서 피가 흐르는 걸까. 어디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내 창백한 얼굴을 나는 들여다봤어. 더러운 내 손들은 움직이지 않았어. 핏물이 산화돼 진한 벽돌색이 된 손톱들 위로 소리 없이 불개미들이 기어다니고 있었어.

52쪽)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57쪽)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3장 일곱 개의 뺨

69쪽)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던 열아홉살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들이 내쏘는 햇빛의 예리한 파편들이, 달궈진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어 눈동자를 찔렀다...(중략)...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에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에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77쪽)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장을 생각하며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85쪽) 어머니가 부쳐준 올배쌀을 공기에 담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89쪽) 여기서 흩어지세요.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 숨으세요.
그녀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때 부서졌다. 땀에 젖은 셔츠에 카빈 소총을 멘 진수 오빠가 여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웃어 보였을 때, 어두운 길을 되밟아 도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얼어붙은 듯 지켜보았을 때. 

92쪽) 그런 소리를 그녀는 처음 들었다. 수천사람의 단호한, 박자를 맞춘 군홧발 소리. 보도가 갈라지고 벽이 무너질 것 같은 장갑차 소리.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 침대에선가 어린 환자가 애원했다. 엄마, 창문 닫아줘.  닫았어. 더 꽉 닫어. 꽉 닫았다니까.

102쪽)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4장 쇠와 피

117쪽)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쓸 수 없는 총을 나눠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118쪽)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란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120쪽)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지금도 나는 여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벌레 같은 땀이 스멀스멀 가슴팍과 등으로 흘러내리면, 내가 살덩어리였던 순간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는 걸 느끼며 깊은 숨을 쉽니다. 이를 악물고 더 깊은 숨을 쉽니다.

126쪽) ...(중략)... 십년이 흘렀습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130쪽)
그러니까 형, 영혼이랑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134쪽)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135쪽)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5장 밤의 눈동자

161쪽)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 라고 묻던 성희 언니의 침착한 목소리를 당신은 기억한다. 무슨 권리로 내 이야길 사람들에게 하는 거야, 라고 당신이 이를 악물며 물었을 때였다. 이어 대답하던 성희 언니의 차분한 얼굴을 당신은 지난 십년 동안 용서하지 않았다. 나라면 너처럼 숨지 않았을 거야,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인생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173쪽)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176쪽) 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지? ...(중략)...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 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여,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
예리한 것으로 거푸 그어 붉은 선이 그어진 것 같은 눈으로 당신은 걷는다.

177쪽) ...(중략)...
아니,
언니를 만나 할 말은 하나뿐이야.
허락된다면.
부디 허락된다면.

죽지 마.

죽지 말아요.

6장 꽃 핀 쪽으로

179쪽) 네가 나한테 한 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 번 보여 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시장통 좌판 사이로, 골목골목으로 한 시간을 뒤지고 댕겨도 없어야. 무릎 속이 쑤시고 어찔어찔 골이 흔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이.

187쪽) 목숨이 쇠심줄 같아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 정대네 아부지까지 떠나 괴괴한 문간채는 밖에서 자물쇠로 채워버리고, 꾸역꾸역 가게에 나가 장사를 했제.

192쪽)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