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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밑줄을 긋다

'진실을 말하면 고문당한다고요, 선배님'

김병진, <보안사> 중에서


- 나는 그야말로 진절머리 나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한 해에 몇 번 만나지도 않는 친척의 나이를 물어서 글쎄 몇 살인가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면 욕설을 퍼붓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연도를 물어서 손꼽아 세어보면 이덕룡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자기 일인데 그런 것도 모르냐고 비웃음 섞인 말로 위협했다. 수사관과 내 처지가 뒤바뀐다면 그 사람들도 나처럼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다 큰 어른 중에 국민학교 입학연도를 언제나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수사관들은 나를 위협하고 압박하려고 질문을 퍼부었다.


- "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이야.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이지(고병천 준위).

- 멋대로 해석하고 내린 결론에 따라 폭력이 계속 됐다. 수사관들은 어떤 이유로든 나를 때리려고 했다. 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몇년 전에 쓰던 학생수첩에 약속장소로 무교동에 있는 어느 생맥줏집 약도를 그려놓은 메모가 있었는데, 그 부분에 수사관들이 멋대로 '서'라는 글자를 써넣더니 내가 국내에서 서 형을 만난 게 틀림없다고 꼬투리를 잡았다. 그럴 때면 나무 몽둥이가 등장했고 몸은 부어올랐다.

- 작은 방이었다. 그때까지 있던 방은 형광등을 켰지만 이 방은 벌거숭이 백열등을 켰다. 수사관이 나를 철제의자에 앉혔다. 옷이 벗겨졌고, 몇 번이나 저항했지만 양손과 양발이 의자에 묶였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의자는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지치지도 않고 험담과 욕설을 되풀이하던 수사관들은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며 어떤 스위치를 눌렀다. 몸이 의자에 묶인 채 밑으로 떨어졌다. 캄캄했다. 주위 윤곽마저 파악할 서 없는 칠흑 같은 곳이었다. 순간 숨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꼈다. (중략) 몸부림쳤다. 처음에는 겨우 벗겼지만 손목을 더 세게 붙들어서 코일을 벗길 수 없었다. 옆에서 고병천이 드럼통에 담아놓은 물을 계속 내 몸에 끼얹었다. 물에 빠졌을 때처럼 숨이 막혔다. 발전기 레버를 쥔 이덕룡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간다! 간다!" 광기의 시간이 흘렀다.

- 적을 향한 경계심이 없으니 적이라는 논리는 본말전도다. "설사 일본에 있어도 김일성과 김일성을 지지하는 자를 철두철미하게 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심이다." 고병천이 말했다. 몇십년 동안 본국 국민과 재외한국인을 벌벌 떨게 한 논리였다. 그 논리는 마치 어린아이가 출입금지된 잔디밭에 들어갔다고 해서 사형을 선고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반공법, 오늘날 국가보안법은 고병천의 저 말을 근거로 삼아 존재한다.

- 저녁이 끝나자 일부러 영수증을 가져오라고 해 15만원이나 나온 사실을 이것 보란 듯이 보여줬다. 뻔뻔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음식에 거의 손대지 않았다. 수사관 열명정도가 옆에서 보기에도 딱할 만큼 게걸스럽게 많이 먹었을 뿐이다. 15만원이나 나온 게 사실인지 연극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이라고 해도 모두 보안사 직원들이 먹어치운 것일 뿐이다. 어차피 자기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도 아닐 텐데 말이다. 모두 오만한 인간들이었다.

- 법정에서 판사가 판단하는 것은 상황뿐이다.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아무리 부인해도 그 진위를 구체적으로 검증하지는 않는다. 이 나라에서 재판이라는 의식이 수행하는 기능이란 수사 당국이 작성하고 겁찰이 검토해 제출하는 고발장이 법조문과 대응하는지 검토하는 것뿐이디.

- "피의자를 법정에 보낼 때는 여기서 북의 혁명사상을 교육한다." "우리가 간첩이라고 말하면 간첩! 교육해 법정으로 보낸다."

- "왜 이렇게 사람을 마음대로 갖고 놀고, 말하게 하고, 쓰게 하는 겁니까?"

- 조사를 할 때. 진위 여부는 상관없었다. 거의 10년 전에 일본에서 서 형을 만나 한국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짜장면이라는 음식을 중국 요릿집에서 파는데 무척이나 싸고 맛있다"라고 말한 일이 '서울의 물가시세 등을 탐지, 수집, 보고해 간첩짓을 하고...'라고 쓰여 있었다.

- 이름만 들어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천하의 보안사지만, 그 알맹이는 속임수와 어리석음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수사관들이 믿을 것은 국가의 권위와 민중의 어리석음뿐이다. 그런 무리는 권력기구에 박혀 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중추로 행세하며 권력을 생산해왔다. 그러므로 나라의 비극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 보도가 나가고 내가 그 부동산 앞을 지날 때마다 아저씨는 모습을 감췄다. 아저씨는 나를 간첩이라 믿고 보안사에 협력했다. 보도에서도 틀림없이 간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교도소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자기 가게 앞 큰길을 버젓이 오갔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탓에 아저씨는 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한국의 마을은 내막을 들추면 불신의 마을일지도 모른다. 어디서, 누가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움직이는지 모를 곳 아닌가. 불신의 근원은 통장이나 집배원이 아니다. 권력이 사람을 조종하는 게 문제다. 통장과 집배원 두 사람을 인간적으로 비열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가혹하다. 두 사람을 원망해선 안 된다. 

- 스케줄! 그래, 이 사람들은 계획에 따라 고문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자기들끼리 합의한 다음에 행동으로 옮겼다. 어느 정도로 고문할지, 어떤 태도로 피의자를 대할지 모두 미리 정해놓았다. 그러므로 C씨가 아무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좌우지간 무조건 잘못했으며 수사관들의 말이 모두 맞다고 머리를 조아려도 수사관들은 자기들의 스케줄을 완전히 소화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 돈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갈기갈기 찢긴 채, 땅에 버려진 우리 가족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데 집착했다.

- '진실을 말하면 고문당한다고요, 선배님.' L씨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있는 일만 말하라고 이미 몇 번이나 되풀이한 말을 마지막으로 또 한 번 하고 방에서 도망쳤다. L씨의 눈길이 내 그림자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따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