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너는 내 마음에 남아/밑줄을 긋다

존중받는 내일을 위해 견디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685399.html


- 열심히 일하는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을까? 보통의 경우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 일 욕심을 부리며 개미처럼 일하는 것은 흉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여자라면, 그것도 가정이 있는 여자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느냐는 질문과 간섭이 달라붙기 시작한다. 어린아이는 엄마와 유년기를 보내는 게 정서에 좋지 않느냐는 걱정을 가장한 참견부터, 둘이 안 벌면 안 될 정도로 집안 사정이 어려우냐는 비아냥, 결혼까지 했으면 일 욕심은 줄여도 되지 않느냐는 성차별적인 언사와 젊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지 않느냐는 노골적인 퇴직 요구까지. 조금씩 상황이 개선된다고는 하나, 아직 한국에서 기혼 여성이 일 욕심을 내는 건 수많은 편견의 벽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다.


- 박지윤은 그렇게 존중받는 내일을 위해 존중받지 못하는 오늘을 견뎠다. ...(중략)... 첫아이 출산 뒤 40여일 만에 방송에 복귀하자 사람들은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칭찬하는 대신 ‘출산이 체질이냐’는 짓궂은 농을 걸었고, 맡은 프로그램마다 조기 종영했던 프리랜서 초창기 시절을 반복하기 싫어 치열하게 달리니 ‘욕망 아줌마’라는 해괴한 별명이 따라붙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세상은 ‘농담’ 속에 뼈를 숨겨 박지윤의 발목을 건 것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바람직한 여자 연예인 체형’을 벗어났다고, 결혼하고 출산도 했으면 좀 쉴 것이지 왜 그렇게 악착같이 나오냐고. (실제로 첫 문단에 적은 글의 대다수는 박지윤이 둘째 출산 27일 만에 제이티비시 <썰전>에 복귀했을 때 인터넷에 올라온 네티즌 반응들과 궤를 같이한다.)


그때마다 박지윤은 부당한 게임의 법칙에 항의하기보단 자신을 더 많이 내려놓는 쪽을 택했다. 아이 엄마라는 캐릭터를 적극 활용해 “모유 수유를 했더니 글래머가 됐다”는 더 센 농담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출산 뒤 이른 복귀를 놀리는 말들에는 “타고나길 강골로 태어났다”고 맞받아치며, ‘욕망 아줌마’라는 센 별명이 생기자 아예 상표권 등록을 해버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한국 사회가 여자 연예인을 대하는 태도를 억척스러운 아줌마의 캐릭터로 극복하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우회하지 않으면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들 수 없다.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슈퍼우먼이 되어야 비로소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가사노동, 육아 등의 성 역할 고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말하는 건 불공정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만 귀를 기울였다. 박지윤은 이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올라가 끝내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합당한 존중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섰을 때 잊지 않고 조용히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여자에게만 더 많은 걸 요구하느냐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존중을 해줄 셈이냐고.


지난해 10월 제이티비시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박지윤은 “아이들이 자랄 때는 엄마가 아빠보다 더 많이 옆에 있어줘야 좋다”는 패널들의 말에 차분히 “아빠가 대신해줄 수 없는 (엄마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하기 시작하면 여성의 사회진출이 근본적으로 막힌다”고 반박했다. 평소 고수하던 ‘욕망 아줌마’의 캐릭터를 벗은 박지윤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어조로 패널들을 설득했다. 지금은 자신보다 남편이 더 많은 시간을 육아에 할애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셋째도 가지고 싶고 일도 계속하고 싶은 자신이 그렇게 비정상이냐고 묻는 박지윤의 질문은 공손하지만 단호했고, 토론 전 5 : 6이던 정상 대 비정상의 비율은 토론이 끝난 뒤 7 : 4로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