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사실'과 '개인' 사이에서

쉽게 쓰지 말아야 할, 그러면서도 쉬이 내뱉어버리는 말이 '상식, 선/악, 옳다/틀리다'다. 군사독재정권시절 총칼을 들고 앞장 섰던 사람들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을 볼 때면 이 단어들은 더욱 힘을 발휘한다. 그정도로 권력과 탐욕이 정의와 공익을 짓밟는 사안이 아니어도 마찬가지긴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이야기의 전달자들은 경계하며 써야 할 단어들이 바로 '상식, 선/악, 옳다/틀리다' 아닐까.


'철저히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말을 표지에 쾅 박은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을 읽는 내내 나는 기자로서 사실을 전달하는 것과 그 뒤에 '개인'을 남기는 것 사이에서 현기증을 느꼈다. 며칠 전 민감한 사안을 취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그럼에도 좀처럼 풀리지 않을 문제일 것 같다.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 - 8점

고나무 지음/북콤마


저자 프로필) '어느 관계자는' '정부는' '검찰은'과 같은 주어를 쓴 문장을 가장 경멸한다. 추상적인 기관, 단체, 익명 뒤에 숨은 진짜 주어의 표정과 감정을 포착하는 게 기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은 일간지 기자라는 옷이 목 죈다.


26쪽) 진보는 늘 보수를 비웃는다. 비웃음은 무기력하다. 진보는 토론에서 이기고(혹은 이겼다고 착각하고) 현실에서 패배한다. 나는 보수가 두렵다.


128-129쪽) 전두환에 반대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1979년말의 민주주의는 거리에서만 존재하는 불완전하고 무력한 것이었다. 거리의 민주주의는 여당과 군부 등 통치 집단과 이어지지 못했다. 거리의 민주주의는 광화문에 닿지 않았고, 투쟁하는 민주주의는 통치하는 민주주의로 진화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글라이스틴이 1980년 3월 전두환은 악마가 아니라고 정의한 문장은 여전히 옳다. "우리 미국은-특히 나를 포함해서-전두환을 모든 악의 사악한 근원으로 여김으로써 한국 정치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선 안 된다. 개인적 결정이 국가에 운명적일 수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의 반열에 전두환이 오른 것은, 우연이다." ...(중략)... 전두환이 악이라면 1979년에 왜 선은 악을 이기지 못했을까. 이 질문의 답은 1987년에 아직 열정적인 민주주의자였던 청년기자 조갑제의 문장으로 갈음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는 1980년대 말 정승화를 인터뷰한 뒤 소회를 말했다. "그의 증언을 정리하면서 느낀 나의 주관적 소견을 붙인다면, 정승화씨는 선한 사람이다. 선하기에 이런 증언을 할 수 있는 집념과 용기가 우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강하지 못했다. 우리 역사가 그에게 '강해야 할 때'라고 요구할 때 그는 역사의 부름에 화답하지 못했다. 우리가 12•12 사건과 정승화씨로부터 끌어내야 할 과제는 '선하면서도 강력한 권력'을 이 나라에 세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52쪽) 전두환은 뒤틀린 마키아벨리주의자다. 기록을 뒤적이다 보면, 무채색의 활자와 행간 사이에서 리더 전두환의 실루엣이 걸어나온다. 결과를 중요시하고, 냉혹하며, 사랑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기를 좋아했고, 사자처럼 힘의 권위를 숭배했다. 


167쪽) 10대 사춘기 시절의 전두환의 삶을 '살아남기'로 표현해도 될 것 같다. 가난과 좌우익의 갈등이 생존을 시험하는 두 개의 연옥이었다. ...(중략)...예민한 소년에게는 짐승의 시절이었을 것이다.


253쪽) '너는 누구 편이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입장을 먼저 묻는 사람들의 뜨거움 앞에, 입장의 근거를 질문하는 사람들의 미지근함은 열기를 잃는다.


274쪽) 개념어는 진실을 감추고 상상력을 가둔다. '부실기업 정리'라는 개념어는 독재정권이 어떻게 기업을 살리고 죽였는가라는 질문을 가로막는다. 블랙코미디의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293쪽) '뻔하다'라는 단어는 '직업적 회의주의자'인 기자가 가장 멀리해야 할 말과 태도다.


뱀발) '사람 전두환'을 보여주고 싶다는 저자의 뜻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려졌다. 하지만 산만하고, 오히려 전두환이란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시대보다는, 그냥 시대와 또 다른 사람들만 보이기도 하더라. 특히 조갑제 이야기는. 찾아보니 <한겨레21>에 실었던 기사였다. 그래도 아래 문장은, 저자의 말대로 "기자들의 가슴을 친다."


"기자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독자가 읽고 싶어하는 것을 쓰는 직업인이 기자다. 내가 쓰고 싶어하면서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는 소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래다. 물기둥을 일으키면서 유유히 대양을 떠도는 고래와 이 순진무구한 고래들을 글자 그대로 작살낸 인간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다."


- 1988년 7월 <조갑제의 대사건 추적-군부> 머리글


뱀발2)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쓴 천금성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