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두 마리에 만 오천원짜리 숭어회로 풍성한 술상 앞에서 아빠와 말다툼을 했다. 결국 정치 때문이다.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은, 대개 부녀간 정을 상하는 일로 끝났다. 그럼에도 대선이 가까워지니 입이 근질근질했다. 참았어야 했는데.
그날 밤도 끝내 참지 못했다. 투표를 위해 평택집을 찾았다. 선거 하루 전날, 이미 선택을 마쳤을 아빠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별 수 없었다. 누군가는 미래를 볼모삼아 읍소했다는데, 그런 낯간지러운 일은 불편했다. 어쩌지 한참을 고민했다.
"아빠, 내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한 표 주시지...?"
"쓰잘데기 없는 소리하지마!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줄 알어?"
순간 "세상은 바뀐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대꾸는 또 다시 상처로 돌아올 게 뻔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깊은 밤이 지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 처음 뽑는 대통령이었다. 누군가의 당선보다 낙선이 절실했기에, 그것만이 조금은 나은, 아니 어쩌면 최소한의 것들을 바로잡는 일이라 기대했다. 그런 간절함으로 선거를 기다리고, 그런 기대감으로 투표소에 들어간 적은 처음이었다. 참 힘주어, 천천히 기표를 했다. 행여나 종이를 접을 때 인주가 번질까봐 후후 입김을 불었다.
투표를 마치고, 투표를 할 수 없는 이들을 만났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철탑농성을 시작한 지 꼭 30일째인 날이었다. 전날 밤늦게 인터넷을 뒤적여 해직언론인 선배들의 이름도 찾아봤다. 아버지를 잃고 테러리스트란 누명마저 덮어쓴 남편이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와 함께하길 빈다는 누군가의 글도 읽었다. 그들이 하루빨리 저마다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길 빌었다. 내 한 표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길 바랐다.
시간마다 치솟는 투표율이 그 기대를 더 부풀어오르게 했다. 그만큼 더 믿기어려웠다. 예상을 빗나간 출구조사 결과, 그보다 더 크나큰 격차로 돌아온 개표 결과. 찬바람이 매섭던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그냥 너네 하는 소리 듣기 싫어, 시끄러워'란 말같다고. 51.6%란 지지율을, 1500만여표란 숫자를 기호 1번 후보에게 안겨준 사람들의 뜻은 그런 것 같다고. 2012년 12월 19일의 밤은 길었고, 추웠고, 쓰라렸다.
절반은 환호하고 절반은 절망했던 밤이 지났다. 사람의 회복력이란 때때로 무서울 정도다. 말 한마디 잇기 어렵던 어제의 충격에서 나도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앞으로의 5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를 생각하려는 중이다. '어떻게든 다 살아지더라'는 옛말이 맞다. 그래, 우리도 어떻게든 살겠지. 조금 더 슬프고 아프고 추우면 어떠랴. 어떻게든 살겠지.
다만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가련다.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비관하면서도 낙관하며. 우리가 이번 선거 결과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정치공학이 아니라 '생의 의지'가 아닐까. 그의 51.6%에 담긴 의미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48%에 그쳐버린 이유는 아마도 어떤 오늘을 살아가고, 어떤 내일을 꿈꾸는지를 두고 더 많은 사람들과 그 뜻을 나누지 못한 것 아니었을까.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란 노래를 부르며 사는 날과, '영토주권 포기, 대북 퍼주기, 좌파빨갱이'라고 선을 그으며 사는 날과,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의 인권은 잠시 미뤄두는 날이 우리가 바라는 날과 무엇이 다른지 또 그게 어떤 삶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걸 현실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해서 아닐까. 그 삶을 향한 의지로, 그 삶을 의심하는 눈빛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조금씩, 조금 더 빨리 '멘붕'에서 벗어나고 고민해봐야겠다. 일단 그 시작을 위해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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