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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머뭇거림보다는

냉면 때문에 웃고, 울고, 싸우고, 죽고...

옛날신문에서 찾아본 ‘냉면은 사연을 싣고’


어떤 음식은 때때로 사람을 살린다. 압력밥솥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날씨가 이어질 때 먹는 냉면 한 그릇이 그렇다. 쫄깃쫄깃한 면발, 얼음이 동동 뜬 육수의 가치는 시대를 불문하고 여름마다 빛났다. 수은계가 점점 높은 숫자를 가리키는 5~8월이면 냉면 소개 기사가 한 번쯤은 신문에 등장하는 이유다. 


'맛있고 영양있는 여름음식' 중 하나로 냉면을 소개하는 동아일보 1983년 7월 7일 기사 ⓒ 동아일보




그럼 현재 검색 가능한 ‘최초의 냉면 기사’는 무엇일까? 1920~2000년 동안 발행된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한겨레> 기사를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냉면’을 검색해봤다. ‘삼민생(三民生)’이란 정체불명의 필자가 쓴 지난 1920년 6월 6일 <동아> 1면에 실린 칼럼이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서선(西鮮)에서 돌아와(2)’란 제목으로 실린 이 글은 “작년 만세 사건으로 수감됐던 사람들이 해주감옥에서 풀려나 돌아오자 친척과 옛 친구들이 냉면을 대접했는데, 허가 없이 회식을 했다는 죄명으로 모두 경찰서 구류장에 수 시간 동안 갇혔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서선’은 평안도·황해도 등 조선의 서북지방을 일컫는 말이다. 


최초의 ‘냉면’ 관련 기사는 “무단 냉면회식죄로 잡혀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목으로 짐작컨대 필자는 서북지방을 여행하던 길에 이 ‘냉면사건’을 접하고, 나라 잃은 설움을 삼키며 칼럼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지막 문단에서 “우리의 과거 역사를 보면, 뭉치면 발전했고 흩어지면 쇠퇴했다”며 단결을 강조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냉면 한 그릇마저 마음대로 먹을 수 없던 시대의 슬픈 이야기다.


여름철, 생기를 북돋아주던 냉면이 사람을 해치는 음식이 된 때도 있었다. 위생상태가 열악했던 1970년대 이전에는 냉면 때문에 식중독을 앓고 중태에 빠지거나 사망까지 이르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1939년 7월 9일 <동아>에는 강원도 평창군에서 처남과 매형이 함께 냉면을 먹고 복통을 앓다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경향>은 1963년 6월 25일자 신문에서 서울 종로의 냉면집에 들렀던 여성 넷이 식중독을 앓게 돼 현재 중태라는 소식을 알렸다. 


누군가는 냉면 한 그릇 탓에 ‘불효자’가 됐다. 1962년 7월 19일 부산에 사는 이아무개씨는 전날 밤 일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간 후 혼자 냉면을 사먹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왜 아버지는 냉면을 사먹느냐”며 돌로 아버지의 머리와 가슴 등 10여 군데를 마구 때렸다. 전치 2주 진단이 나올 정도였다. <경향>에 따르면 동부산서(현 부산 동부경찰서)는 이씨를 존속상해치상혐의로 구속했다.


일을 구하러 나간 아버지가 가족 몰래 혼자 냉면을 먹다가 아들에게 들켜 돌로 맞는 일도 있었다. 1962년 7월 19일 경향신문은 부산의 이아무개씨가 아버지를 돌로 때려 존속상해치상혐의로 구속됐다고 보도했다. ⓒ 경향신문





한편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장군의 노고를 치하하며 대접한 요리도 냉면이었다. 1968년 4월 5일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전날 “전진과 땀에 흠뻑 젖은 전투복 차림으로 급거한 채명신 주월한국군 총사령관에게 특제 곱빼기 냉면을 대접하며 전지의 노고를 위로”했다. <경향>은 “채 장군은 18개월만에 냉면을 먹어본다면서 단숨에 한 그릇을 들고는 새 그릇에 손을 대면서 ‘월남의 전우들에게 이 냉면을 보냈으면 한이 없겠다’고 작열하는 뙤약볕 밑에서 끓는 수통물로 목을 축이고 있을 부하의 생각에 잠시 젖었다”고 보도했다.


평양냉면집 노동자들, ‘냉면의 힘’을 보여주다


냉면의 고장 평양에서는 냉면집 종업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1938년 12월 2일 <동아>는 “평양명물의 냉면이 부민들의 주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일종의 보이콧을 하게 됐다”며 “냉면집에서 일하는 240여명이 조직한 ‘평양면업노동조합’이 동맹파업을 단행해 냉면당의 머리를 앓게 하고 있다”고 전했다. 평양면업노조는 냉면집 측에 지난달 일급을 최소한 10전씩 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12월 1일부터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던 업계가 임금 인상을 10일로 미루자 이에 항의하며 파업을 벌인 것이다. 


칼국수를 즐기기로 유명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곁에는 ‘냉면 총리’도 있었다. 1994년 4~12월 동안 재임했던 이영덕 전 국무총리는 냉면 애호가로 유명했다. 취임 후 이 총리는 아예 ‘냉면 뽑는 기계를 총리공관에 들여놨다. 1994년 5월 12일 <경향>은 “앞으로 총리공관에서 열리는 식사모임에 냉면을 주로 내놓을 생각”이라며 “수육과 빈대떡을 곁들이는 냉면의 경우 외부요리사를 동원, 제공돼온 한식·중식·양식보다 약 1만원 정도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는 총리실 관계자의 발언을 소개했다.


냉면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 핵심은 역시 ‘사랑’이다. 수많은 낮과 밤 동안 서로를 그리워했던 남북 이산가족이 마침내 손을 맞잡은 날, 그들은 오순도순 모여 냉면을 먹었다. 1987년 2월 11일자 <경향>은 “전날 서울을 방문한 북한 주민 김만철씨가 남한의 누나 김재선씨를 만나 점심으로 함흥식 냉면을 들었다 ”고 소개했다. 


수십년 동안 떨어져있던 남북 이산가족이 서울에서 만난 날 점심식사로 냉면을 나눠먹었다. 1987년 2월 11일 경향신문. ⓒ 경향신문




소설가 고 이병주씨가 1984년 <경향>에 연재했던 <서울 1984>의 여자주인공 강신애는 남자주인공 임계순에게 “당신이 마음에 들었다”며 “우리 냉면 먹으러 가자”고 제안한다. 임계순은 냉면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좋다’며 일어섰다. 냉면은 곧 사랑이었다.


2011. 6. 1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3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