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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출처 : 김진혁 pd의 e야기 http://blog.daum.net/jisike/7892962


...(생략)...

나중에서야, 정확하게 말해서 지식채널e를 하면서 나는 내 글의 문제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5분 분량의 프로그램이다 보니 수험생 때 쓴 글의 길이와 비슷했고, 연출하는 3년 간 어쩌면 난 수험생 때 했던 글쓰기 연습보다 수백배 더 강도 높은 연습을 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답은 '클래식하게 글쓰기'의 효과에 있다. 혹은 '참신하게 글쓰기'의 함정에 있다. 즉 클래식하게 글을 쓰면 최소한 글 쓴 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읽는 이에게 전달 될 가능성이 가장 높게 된다. 반면 참신하게 글을 쓰고자 하면할수록, 어지간한 내공이 되지 않게 되면 읽는 이의 입장에선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식채널e는 무난해서는 안되는 프로그램. 당연히 전달이 잘 되면서도 참신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그러면서 내가 깨달은 점은 아래와 같다.  

1. 한 놈만 패라.

주제를 잡으면 떠오르는 소재는 많게는 수십 가지. 이 모든 걸 짧은 글 안에 다 집어 넣게 되면 내용이 매우 산만해지고, 아무리 좋은 소재라도 제대로 표현할 '분량'이 나오질 않는다. 단편 소설 정도의 길이에나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1,500자 안에 다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채널e의 최초 구성안에서 대개의 경우 30%~50%의 분량을 '덜어내야' 5분을 가까스로 맞출 수가 있었는데, 그 구성안이라고 해봤자 몇 자 안되는 자막으로 된 a4지 3~4장 수준이었다.

따라서 꼭 말하고자 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소재 하나, 정 안되면 주요 소재 하나 부수적 소재 하나 정도로 해서 그 소재에만 집중해서 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고 당연히 글을 읽는 이도 적어도 쓴 글에 대해서는 공감(좋든 싫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최소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된다. 

2. 구성은 단순하게

짧은 글에서 복잡한 구성을 사용하게 되면 역시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기승전결만큼 강렬한 구성도 없다. 기승전결은 상투적인 구성이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구성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구성이 단순해야 해당 항목에 글을 채워 넣을 때 구성을 신경쓰지 않고 단어 선택이나 문장 기교와 같은 디테일한 부분에 신경을 쓸 수 있다.  

3. 참신성은 표현이 아니라 '생각'이다.

참신함은 문장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글 전체에 담긴 글쓴이의 '생각'에서 온다. 그건 아마추어나 프로나 다 마찬가지다. 또한 그 참신성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다 보는 것에서 '내'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소에 같은 사물에 대해서 '나만의 생각'을 가지려는 노력없이 오직 글쓰기 연습만 해서는 생각의 참신성을 담보할 수 없다. 또한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독특하게 생각하는 이들의 작품이나 글을 많이 보면 도움이 된다.  

4. 어차피 내 글은 나 이상일 수 없다.

글쓰기 연습을 아무리 해도 문장력이 아무리 향상이 되도, 결국 '글'이란 한 사람의 생각을 문장으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각엔 그 사람의 지식, 성품, 인격, 취향 등이 모두 녹아져 있다. 따라서 중요한 건 우선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면서도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아무런 주제나 던져서 짧은 시간안에 생각나는대로 글을 써 보는 거다. 일종의 '연상법'인데, '눈'이란 주제를 던져 놓고 생각나는대로 마구 써내려 가다 보면 나 조차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눈에 떨어진 핏방울을 따라가 봤다. 얼마 가지 않아 엄지 손가락으로 보이는 잘려진 마디 하나와 식칼이 떨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작은 비닐하우스 하나가 있었다... 

내가 왜 갑자기 '핏방울'이 떠올랐는지는 나조차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에 이 글을 끝까지 완성시킨다면 어렴풋이나마 내 안에 있는 생각의 파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뿜어져 나오는 피를 누르며 신음을 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옆에는 서류로 보이는 구겨진 종이들이 널려 있었고, 모든 종이 위엔 잘려진 엄지 손가락만한 지장들이 찍혀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끝났다. 이제 다 됐어. 아무 일 없을 거야..." 며칠 전 검은 양복을 입고 집 앞을 서성이던 남자들이 떠올랐고, 그날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며 담배를 피던 아버지가 떠올랐고, 내일 미술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들이 생각났다. 내가 아버지에게 '미술 시간에 준비물 사게 만원만 줘'라고 말하면, 이제 아버지는 엄지 손가락 없이 어떻게 지갑에서 돈을 꺼낼까...궁금해졌다. 

이런식으로 그냥 막 써내려가 보는 것이다. '나'도 알고, 글쓰는 '순발력'도 키울 수 있고, 무엇보다 '그냥 막' 쓰는 거기 때문에 '내 생각'이 검열 당하지 않고 독특함 그대로 종이 위에 옮겨지게 된다.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나만의 참신성을 내 밖으로 빼내는 훈련이라 보면 된다.

5. 결국 다독,다상량,다작 밖엔 없다.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면 반드시 글이 는다. 그러나 대개 많이 보지만 많이 생각하지 않고, 많이 생각하지만 많이 쓰지 않는다. 혹은 많이 본 것과 많이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많이 생각한 것과 많이 쓰는 것이 다르다. 하나의 '주제'혹은 '소재'에 대해 다른 이들이 쓴 글을 보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반드시 자기 나름대로 쓰는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가야 한다. 매우 고단하고 지루한 작업이지만-지식채널e는 좋든 싫든 이걸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게 내게 많은 도움이 됐다.-반드시 실력이 향상된다.

뱀발.

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눈 위에 떨어져 있단 아버지의 손가락과 식칼을 살며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내 엄지손가락을 식칼로 살짝 베서 그 피를 아버지의 손가락에 떨어 뜨렸다. 그리고 언젠가 검정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피도 아버지의 손가락 위에 떨어뜨려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칼과 손가락은 그렇게 내 삶의 좌표가 됐다.



글을 쓰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다른 하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타인과 대화하려는 것. 즉 남에게 읽히는 글을 쓰는 것이다.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오랜 생각이다. 소설가나 시인은 자신이 없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일은 결코 내 깜냥으론 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럼 수필가는 어떨까?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 삶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하나둘 지워가다보니 남는 게 기자였다. 흰 실험복을 입고 하루종일 실험하고, 공부하는 랩생활이 답답하게만 느껴졌고, 그래서 '활동적인' 직업을 갖고 싶다는 욕구와 호기심은 직접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등등이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언시생'이란 타이틀을 가지게 된 이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당장 내가 쓰고 있는 글들과 쓰려하는 글들은 '합격을 위한'에 맞춰진다. 시험 때가 되면 예상 주제를 뽑아보고, 제한된 시간 안에 글을 작성하는 연습을 하고... 무엇이 좋은 글인지, 어떻게 좋은 글을 써야 할 지란 고민도 결국 '합격'이라는 목적으로 이어진다.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아니었는데, 이제는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로 '합격'을 꼽는 것 같다.

다시 마음을 다 잡는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혼자 살아가는 삶을 믿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철저히 혼자일 수는 있지만, 사회속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소통의 방식은 다양하다, 그것은 말이 될 수도 있고 행위가 될 수도 있고, 글이 될 수도 있다."

몇년 전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혼자 끄적거렸던 내용이다. 아직 그때의 마음은 내 안에 잘 자리잡고 있다. 조곤조곤 내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단어와 단어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에 내 생각과 감정의 정수들을 뿌려놓고 싶다. 그 미세한 가루들이 내는 빛과 향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위해, 나와 공명(共鳴)하고 같은 생각으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 나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정말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