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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그냥 떠다니고 있어요(I'm drifting)"

"바람이 불었고, 결심했다.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손발이 오글거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던 이야기를, '후기'란 걸 쓰게 되어서야 털어놓았다. 고민하고 관심갖게 했던 상황들이야 많았지만 '결정적 순간'은 정말 그랬다. 하지만 그 순간, 마음을 채웠던 열정과 의지의 생명은 길지 않다. 추억보다 짧다.


만약 열정 혹은 의지마저 없다면? 타다 만 장작개비와 물에 젖어 아예 불이 붙지 않는 나뭇조각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할까? 아마도 후자일 것 같다. 영화 <졸업(1967)>의 주인공 벤자민(더스틴 호프먼)의 모습과 비슷하다. 갓 대학을 졸업한 그는 좋은 성적, 우수한 교내 활동 등으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텅 비어 있는 상태다.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니, 벤?" "그냥 떠다니고 있어요(I'm drifting)."


황량한 마음의 원인은, 상상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이는 타인의 작은 손길에도 쉽게 흔들린다. "이건 부도덕한 일"이라면서도 그가 로빈슨 부인을 거부할 수 없던 까닭도 비슷했으리라. 헤어나오기는커녕 그 '위험한 관계'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으리라. 하지만 욕망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덮으려 했던 벤의 노력은 실패했다. '위험한 관계'에는 몸의 대화만 있었다. 얇은 인연의 동앗줄을 붙잡는데 '말'은 아무 쓸모 없었다. 차라리 스타킹을 신는 그녀의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더 유효했다. 


졸업 후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벤자민은 로빈슨 부인과 '위험한 관계'에 빠진다.


하루하루 단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 앞에 일레인이 나타났다.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 함께라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벤은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동물원 원숭이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계속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자동차가 고장났고, 몇날 며칠 제대로 먹고 자고 씻지 못해 엉망이 된 꼴로 그녀의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손을 잡고 떠났다.


일자리를 구하기는커녕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기력한 벤의 모습은 오늘의 20대와 닮았다. 의지보다는 욕망 앞에 무기력한 것도 그렇다. 영상미나 음악 등 여러 구성 요소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개봉 시기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영화를 보며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벤과 우리가 닮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위로 혹은 '20대 개00론'이라는 비난을 던지며 기성세대는 20대에게 말한다. '제발 좀 움직이라'고. 모르고 있다. 우리는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을.  


구원이라 믿는 일레인과 도망치기 위해 그녀의 결혼식장에서 빠져나오려는 벤자민.


그럼 일레인은 '구원'이었을까? 사실 궁금하다. 과연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영화에서 가장 설득력 없게 느껴진 부분이기도 했다. 그는 첫 만남에서 사랑에 빠졌고, 불안과 공허의 탈출구가 그녀라고 확신했다. 미친 듯이 일레인을 찾아 떠돌았고, 결혼식장에서 함께 도망쳤던 다른 까닭을 찾기 어렵다. 일레인은 그가 숨쉬고, 움직이게 한 이유였다. 여전히 그가 한 '일'은 졸업뿐이었다.


안타깝지만, 사랑은 온전히 불안을 잠식할 수 없다. '너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눈, 그 기대감을 받아낼 수 없는 작은 마음으로 '학교 밖'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지금처럼 사회구조적으로 취업이 어렵고, 절망하기 쉬운 상황이라면 더욱 끔찍하다. 텅 빈 그의 눈빛에서, 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장작같던 내 모습을 겹쳐보면서도 더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열정과 의지가 없는 황량한 삶을 안다. 탈출구가 사랑이 아니라는, 낭만이 사라진 슬픈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음도 알고 있다. 영화 <졸업>을 보는 내내 마음 한 켠이 짠하면서도, 버스 안에서 해맑게 웃는 그들의 모습을 마냥 축하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