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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세종은 완벽하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 세종, 그는 완벽한 왕은 아니었다. 한글을 만들고 음악, 과학 등 여러 분야를 발전시키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실천했지만 세종 또한 실패를 겪었다. 즉위 초 그는 ‘조선통보’라는 화폐를 만들었다. 동전을 쓰지 않고 전처럼 물물교환을 하는 사람의 재산은 몰수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며 화폐 사용을 강제했다. 하지만 유통 가능한 동전 수가 부족한데다 백성들은 “당장 배고플 때 먹을 수도, 쓸 수도 없다”며 화폐를 불편해했다. ‘재산 몰수’라는 엄벌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도성 안에 불을 지르고, 도둑질을 하기까지 했다. 세종은 결국 법을 고쳤다. 화폐 정책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풀지 못한 숙제요, 그의 실패로 남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종의 실패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가 실패를 ‘인정하는’ 지도자였음을 기억한다. 

세종의 한글 창제 이야기를 다뤄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SBS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달랐다. 실패를 인정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이승만은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고 폐허가 된 나라를 정비했지만 ‘독재정치를 멈추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 경제를 우뚝 세웠으나 민주주의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탄압했던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재․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후 들어선 정부 역시 비슷했다. ‘측근 비리’라는 악습은 이어졌고, ‘개발주의’란 낡은 삽 아래 국토는 제 모습을 잃어갔다. 외환위기에 따른 소비침체를 해결하고자 카드 사용을 적극 장려했던 결과는 ‘신용 대란’으로 돌아왔고, ‘부동산 투기 뿌리를 뽑겠다’고 외쳤지만 오히려 아파트값은 치솟는 등 정책 실패가 계속 됐다. 독재정치의 폭력에 쓰러진 사람들, 경제정책의 실패로 무너진 사람들, 지도층의 부도덕함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내가 잘못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대통령은 없었다.

대통령이 안 해 본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뉴시스

부인(否認)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747 공약’을 내세우며 등장한 ‘경제 대통령’은 ‘경재(災)’를 낳았다. 부자․대기업의 세금을 줄여 민간 투자와 소비를 활성화하겠다던 정부의 목표와 달리 돈은 고스란히 가진 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지난 4년간 상위 10%와 하위 10%의 소득 차는 꾸준히 늘었고, 대기업의 현금 보유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는 통계가 뒷받침한다. 4대강 사업으로 강을, 지역경제를 살리겠다고 했지만 지하수가 넘쳐 농지가 잠기고 공사기간에 반짝 일자리가 늘고 소비가 살아났을 뿐이었다. 여기에 낙하산 인사로 공공기관은 물론 언론계를 통제하고, ‘독실한 이 장로님’과 ‘뼛속까지 미국 사랑’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모습들을 보이면서, 눈 감고 귀 막은 채 제 말만 하는 ‘불통(不通)’ 정치까지 더해졌다. 그러나 “잘못했다” 대신 대통령은 “해봐서 안다”고 했다. ‘이게 맞다’ 불도저만 움직였다.
 

조선 최초의 동전 '조선통보' ⓒ다음카페 고전古錢의 이해와 연구

“화폐는 성인(聖人)이 백성들이 편리하도록 만든 것인데 지금은 모두가 싫어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유익하지 않다”며 세종은 화폐정책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리고 더 좋은 정책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신하들과 의논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개화기를 제외하고 화폐 관련 내용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세종 시절이다. 임기 끝에 혹은 임기가 끝나고 난 후 ‘그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봤자 엎지른 물을 도로 담을 수 없다. 누구나 성공한 대통령을 원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누구나 실패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게 아니다’ 보다 ‘이건 잘못했다’고 말하되 실패를 고쳐 성공으로 나아가는 대통령, 때늦은 후회를 피할 줄 아는 대통령, 우리가 기다리는 새로운 대통령의 모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