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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는 중인가요?




몇 달전 경향신문 노조 주최로 열린 '당신과 나의 전쟁' 공동체 상영회에서, 어느 시민이 노조 대표로 참석한 H 기자에게 물었다. 

"쌍용차 파업 때도 그렇고, 대추리도 그렇고, 그런 문제들이 있을 때마다 사실 진보언론들에게 실망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

기자는 답했다. "저희는 대중지입니다. 기관지가 아닌 이상 일반 대중들을 기준으로 기사를 써야 하는데, 지나치게 한 쪽에 치우치면 안 되겠죠. 생활인으로서, 신문을 팔기 위해서도 그렇고요."

질문을 한 시민은 '어떻게 기자가 그렇게 말할 수 있냐'는 식으로 몇 마디 덧붙였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난 대화를 들으며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진보적 가치를 엄숙히 추구하지 않으면 같은 편에서도 욕 먹는' 소위 진보언론들의 현실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경향신문, 한겨레' 등의 이름은 기억한다. 하지만 그 구성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 끊임없이 고민하거나 직장을 옮기는 사람들이 왜 계속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쩜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허지웅씨가 채널A 영화프로그램에 출연한다. 고정 패널인지, 진행인지, 그 프로그램의 내용은 무엇인지, 아니 이름조차 알 수 없는데 일단 '출연' 소식만 알려졌다. 그리고 트위터는 지금 폭발 직전이다. 자신에게 비아냥거리거나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일일이 반박하는, 그 피곤함을 감수하는 진중권씨를 보며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허지웅씨도 비슷했다. 논쟁에 불이 붙을 수밖에. 한때 '트위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없다'로 그와 한때 논쟁을 벌열던 고재열 기자까지 가세, 그야말로 점입가경. 

<한겨레>나 트위터에서 본 허지웅 특유의 시니컬함 + 날카로움 때문에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지금 상황은 그저 물어뜯기요, 인신공격으로밖에 안 보일 뿐이다. 게다가 나꼼수의 선전에 박원순 시장 당선, 한미 FTA 비준동의안 통과가 이어지면서 전선은 넓어지고 분명해졌다. 편가르기만 남을지 모른다. 

종편에 반대한다. 이런저런 상황을 따져보면 흔히 말하는 '진보, 좌파'에 가깝다. 하지만 밥은 힘이 세다. 정의와 신념을 부르짖으며 굶주림을 견딜 수 있지 않다면, 누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부딪치며 산다. 저마다 열등감도 느끼며 버틴다. '먹고사니즘', 즉 밥벌이 문제는 쉽게 비판할 수 있어도 뛰어넘기는 어렵다. 또 대한민국에서 소속 없이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종편 출연 문제를 '부역' 취급하는 건 그저 손쉬운 '비판' 아니 '비난'을 택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신념에 따라 출연을 거부할 수 있다. '먹고사니즘으로 말하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 역시 타당하다. 하지만 누가 옳다 그르다로 접근해서 마녀사냥을 하는 일은 정당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편 가르기는 세상을 단순하고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이지만, 정확하지 않다.  편견은 굳게 하고, 시야는 좁게 만들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허지웅은 물론, 진보언론이 나꼼수 이전부터 한미 FTA 반대를 말하고 민주주의 후퇴를 외쳤다는 것은  내 편 네 편을 따지는 상황에 묻혔다. 사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내 일'이 아닌 것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막상 '내 일'이 됐을 때 '같은 편이 되어주세요, 아님 당신은 적이야'란 식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너무 쉽게 과거를 잊는다. '폭도집단'이라고 매도당하면서도 철거민들을 도우러 다녔던 전철연 같은 단체가 용산과 두리반, 카페 마리를 도왔고, '친북반미 빨갱이'란 별명을 가진 시민단체들이 대추리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강정마을을 도왔다. '나꼼수처럼 대중성을 얻지 못한 걸 반성하라'거나 '종편 출연? 이거 변절자 아냐?'란 식으로 평가하기엔 그 사람들의 희생이 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비록 작고 낮은 목소리였을지어도 계속 말하고 있었고, 어둠에 가렸을지라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편 가르기'로 하찮게 여겨지는 걸 보면 안타깝다. 아니 화가 난다. 노무현을 그리워하고, 나꼼수에 열광하며 반MB를 외치는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사람 사는 세상'이 정말 그런 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