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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몇 가지/조금만 더

노동문제를 사회부 사건기자의 눈으로 보지 마라.

한 방송사에 신입사원 교육을 하러 갔습니다. 수백대 일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신입사원들은 모두 명문대학교 출신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다녔던 학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서 져 본 적이 거의 없는 수재들입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표정과 자세가 다릅니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 속에서 자신들이 곧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된다는 것을 미리 짐작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입사원 연수시간에 노동조합 위원장의 인사말을 듣기 전까지는 자신의 인생에 노동조합이 끼어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장하는 수십 년 세월 동안 제도권 교육과 제도 언론을 통해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일방적으로 주입 받았을 뿐이어서, 자신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존심 상해하는 표정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 노동조합, 노동운동 등에 대한 그릇된 혐오감을 수십년 세월 동안 국민들에게 주입시켜온 나라입니다. 문제는 그 잘못된 시스템 - 대한민국에서 수십년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이 그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국민들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그 가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그 어떤 제도권 교육과정에서도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역사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성장한 우수한 인재들이 대기업 노무관리자가 되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노동조합을 탄압합니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신성한 권리 - 노동조합을 탄압하면서 이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없습니다. 

언론 종사자 역시 노동운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배우며 성장했다는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언론 노동자가 된 사람들이 노동문제를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30년 전,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을 때, 사회부 사건기자들은 그 사건을 개인적인 비관자살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 달에 네 명씩이나 되는 노동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지금도 그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방송사나 신문사 내부에서 노동문제를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하는 언론인들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편협한 세계관을 가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제가 노동문제연구소의 소장으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 노동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때로 살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노동문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와 예술의 향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까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에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 너무 척박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 식민지 40년, 분단 60년이라는 비틀리고 왜곡된 역사를 겪는 와중에, 지금은 누구나 다 군사독재정권이었다고 인정하는 암흑의 세월 30년을 겪으면서 자본주의를 건설한 나라입니다. 그렇게 건설된 자본주의가 정상적일 수 있겠습니까? 사회부 사건기자의 눈으로만 봐서는 우리 노동문제를 절대로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노동문제를 다루는 언론은 그 비틀리고 왜곡된 역사과정을 통찰할 수 있는 역사학자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노동자들이 연이어 자살, 분신하는 이 심각한 사태의 원인을 그 특별한 사건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물을 이해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네 명의 노동자가 속해있는 한진중공업, 세원테크,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특별한 문제라고 파악하는 것은, 30년 전에 전태일 열사 사건을 개인적인 비관자살이라고 보도했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노동자들의 권리가 확대되는 것이 마치 사회 전체에 불이익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국민들을 속여온 수십년 세월 동안 형성된 기형적 사회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 사회 노동자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회 전체에 만연한 노동조합 또는 노동운동에 대한 그릇된 혐오감을 걷어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 언론이 담당해야 할 몫입니다.

- 하종강,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