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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머뭇거림보다는

노무현의 회의록, 윌리엄 태프트의 욕조

[取중眞담] 기록이 힘없는 기록의 나라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사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덩치가 가장 큰 편이던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의 욕조. 특별주문제작된 이 욕조의 길이는 2.1m, 너비는 1.04m에 달하며 성인 네 명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다. ⓒ 미국 백악관 박물관


2009년 3월 미국 워싱턴 D.C. 내셔널 아카이브(국립문서보관소) 설립 75주년 전시장에 거대한 욕조가 등장했다. 성인 네 명은 충분히 들어갈 이 욕조의 주인은 윌리엄 태프트. 키 180cm, 몸무게 150kg에 달했던 미국 27대 대통령이다. 1908년 12월 21일 그는 군함을 타고 파나마운하 건설 현장을 돌아볼 때 선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이 욕조를 주문했다. 전시장 한쪽에는 태프트 대통령이 욕조와 함께 초대형 침대 제작을 의뢰한 빛바랜 주문서도 놓여있었다.


100년 전 대통령이 쓴 욕조와 그 주문제작서가 지금껏 남아있는 비결은 미국의 국가기록물 관리제도에 있다. 건국의 역사는 230여 년으로 길지 않지만,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방대하고 체계적인 기록물 관리제도를 자랑한다. 그 정점에 있는 내셔널 아카이브는 흔히 '미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불린다.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아카이브Ⅱ 현판에 쓰여 있는 문구이기도 하다.


한국도 기록의 나라다. 유네스코는 이미 훈민정음과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등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했다. 왕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만큼 사관이 목숨을 걸고 써내려갔다는 조선왕조실록 이야기는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선조들은 자랑스러운 역사도, 부끄러운 역사도 모두 꼼꼼히 남겼다. 이 '찬란한 기록문화'는 우리의 자랑거리다. 하지만 모두 과거형이다.


정쟁 앞에서 힘 잃은 기록,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건'은 오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대선을 코앞에 둔 2012년 10월 8일,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은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를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기록의 수난사를 알리는 말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임기를 마칠 때면 그동안 생산한 문서를 없애거나 들고 나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문화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대통령기록물 관리제도를 정비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법은 그 결과물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법에 따라 처음으로 자신들이 생산한 기록들을 대통령기록관에 넘겼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이 가운데 30년 동안 비공개로 보호받는 지정기록물로 분류됐다(관련 기사 : "정권교체 후 MB 기록물 보자고 하면 새누리당은?").


기록은 그 자체가 역사며 민주주의의 척도다. 하지만 정쟁(政爭) 앞에선 나약했다. 새누리당은 NLL 포기 논란을 종식하려면 회의록을 열어보자고 했다.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은 여기에 휘말려 회의록 공개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대통령기록관에 회의록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새누리당은 논란의 이름을 '사초 폐기'로 바꿨다. 


정작 회의록이 받은 대접은 사초 수준이 아니었다. 2013년 6월 24일 남재준 국정원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풀어놓은 녹취록 형태의 회의록 완성본 공개를 강행했다. 남북 정상이 머리를 맞대고 나눈 얘기가 그야말로 까발려졌는데도, 기록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기록을 '종북몰이'에 이용하는 정치인의 목소리에 묻혔기 때문이다. 검찰도 거기에 맞춰 "노무현 대통령 지시로 회의록 폐기가 이뤄졌다"며 칼을 휘둘렀다.


끝은 허망했다. 24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2부(부장판사 이원형)는 노 대통령 지시에 따라 회의록 초본을 없앴다(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공용전자기록손상죄)는 혐의를 받아온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안보정책비서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이동근 부장판사)처럼 "회의록 초본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다"란 결론이었다.


검찰은 줄곧 최종결재권자인 노 대통령이 열람을 마친 회의록 초본은 그 자체로 완성된 대통령기록물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상세한 수정·보완지시가 남아있지만 초본은 원본이라는 논리도 펼쳤다. 또 국정원에 완성본이 존재하더라도, 중간과정에서 만들어진 초본은 별개의 대통령기록물이라고 했다.


'찬란한 기록문화'는 계속 과거형으로 남을까


국정원이 제작한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 2013년 6월 24일 국정원은 자신들이 보관해온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완성본을 공개했다. 사진은 완성본 공개 전 내놨던 8쪽짜리 발췌본. ⓒ 권우성


항소심 재판부는 이 회의록에 대통령 결재가 필요한데 노 대통령이 최종 승인을 하지 않은 점이 명백하다며 초본을 정식 대통령기록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회의록 초본은 공용전자기록도 아니라고 했다. 법원의 "수정·보완 지시가 있는 초본은 정식 기록물이 아니다"라는 한결같은 판결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대법원의 판단이 남아있긴 하지만 검찰의 완패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결론이 나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 대중의 기억 속에서 대통령기록물 관리제도를 만든 취지, 의미 같은 이야기는 사라지고, '사초 폐기' 논란만 남을 만한 시간이다. '찬란한 기록문화'가 과거형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여기가 끝일까? 예감은 좋지 않다. 정부와 여당은 회의록 사건만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 행적 논란, 정윤회씨 국정개입 의혹 때도 기록을 이용했다. 유리할 때는 대통령지정기록물인 회의록 공개조차 과감하게 외쳤지만, 불리할 때는 청와대 문건은 대통령기록물이라며 꽁꽁 감추는 모습을 우리는 줄곧 목격하고 있다. 100년 후까지 대통령의 욕조를 보관하는 일 정도는 꿈꾸지도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길 바랄 뿐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63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