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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

"좋은 바람이 불 땐 그 바람에 맡기면 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161559131&code=990100


철도민영화에 반대하는 학내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를 지지한 '서울역나들이'참가자들의 깃발. ⓒ이희훈



…(중략)이 대자보는 다른 사람의 ‘안녕’에서 자신의 ‘안녕’을 찾고 서로에게 안부를 묻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대자보와 결이 다르다. 다른 대자보가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 대자보는 읽는 이에게 말을 걸고 있다. 읽는 사람이 보탤 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타인의 안녕을 돌아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나 돌보고 살아야지 주제넘게 다른 사람의 안녕에 신경을 쓰다가는 자신도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다. 학교에서 친구가 왕따를 당하더라도 못 본 척해야하고 직장에서 동료가 ‘집단적으로’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더라도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외면해야 한다. 대신 자신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을 호소하는 고통에 대한 ‘자기 이야기’는 넘쳐난다. 어디를 가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치유를 받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이 시대에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라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 돌아가면서 서로의 삶을 나누는 자리를 가보더라도 자기 힘든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에 심취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잘 듣지 않는다.


특히 청년세대가 ‘사회문제화’되고 난 다음부터 청년세대들의 글은 어떤 고정된 틀 속에 갇혔다. 미디어에서 청년들에게 글을 부탁할 때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것을 강요하고 기대한다. 그들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말하려고 하면 ‘그건 됐고, 그래서 너 이야기를 해봐’하는 경우가 많다. 교실이라고 다르지 않다. 강사나 교수들 역시 청년들이 ‘청년’에 국한시켜 자기를 서사화할 것을 기대한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들의 말과 글을 타인에게 건네는 ‘말걸기’가 아니라 이 시대에 넘쳐나는 피해자로서의 자기 서사에 가두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대학가에서만도 그동안 꾸준히 다른 이의 고통에 함께 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몇 년 전 대학교 청소노동자들에 대학 안팎을 가르지 않고 많은 이들이 함께 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인은 빠져라’는 배제의 명령에 대해 자신들을 ‘날라리 외부세력’이라 부르던 이들 말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존재를 외면하고는 자신들도 안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선례들이다. 지금 이 ‘안녕’ 대자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런 흐름의 연속에서 다시 말을 건 사례가 될 것이다.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안녕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해 나와 무관하던 남은 나와 연결된 ‘너’가 된다. 나와 남 사이에는 ‘거리’만 있지만 나와 너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는 너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고 다시 안녕을 서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기에 갇힌 이 시대에 이런 ‘말걸기’가 바로 파괴된 세계를 재건하는 힘이다. 나는 이 자보에서 우리 모두가 듣기를 강요하는 말은 많이 했지만 오랫동안 서로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최악은 “요즘 대학생들은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운운하며 ‘기특’해하거나 이 흐름을 “완전 새로운 일”로 포장하여 어떻게든 ‘기획’해보겠다고 나서는 태도다. 그런 말이 오히려 사람들을 팔꿈치로 밀어낸다. 좋은 바람이 불 땐 그 바람에 맡기면 된다. 그 바람에 손부채질을 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 호응하되 들뜨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