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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는 표현 대신 ‘운명을 달리했다’고 그 신문은 썼다. 우선 運命과 殞命 등 ‘운명’의 두 단어를 떠올려본다. 소리 같고, 뜻 다른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다.
運命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다. ‘운명의 힘’ ‘운명에 맡기다’처럼 쓴다.
殞命은 ‘목숨이 끊어짐, 죽음’이고 ‘운명했다’처럼 쓴다. 殞자는 죽을 사(死)자에도 들어있는 부수(部首)자 부서진 뼈 알(歹)자가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듯 ‘죽는다’는 뜻이다.
‘운명을 달리하는 것’이 비유적(比喩的) 표현 또는 넓은 의미로 ‘죽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主張)할 수는 있겠다. ‘다른 길로 갔다’는 뜻으로 멋스럽게 죽음을 의미한다고? 그러나, 일반적인 공감을 얻기는 어렵겠다. 썩 들어맞는 표현이 아니다. 견강부회(牽强附會), 억지라는 얘기다.
‘殞命을 달리하다’는 말이 안 되는 말이다. 따져볼 필요도 없이.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기시감(旣視感) 즉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에 의한 착각이 원인인 것 같다. 기시감이라 하면 좀 생소(生疎)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프랑스어 출신 ‘국제어’인 데자뷔(deja-vu)라고 하면 알 사람들 많다. 영화와 관련한 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단어다. 대충 ‘어디서 본 듯한 기분’ 정도의 뜻이다.
‘유명(幽明)을 달리하다’라는 표현이 ‘돌아가시다’처럼 ‘죽었다’는 뜻으로 활용되어온 말이다. 죽음이 날마다 겪는 흔한 일이 아닌 까닭에 어느 언어건 이를 표현하는 어휘(語彙)는 특이하고 다양하다. 영어만 해도 die, pass away, expire, perish 등이 얼핏 떠오른다.
‘유명(幽明)’은 사람이 죽어서 가야할 저승[幽]과 지금 착실히 살고 있는 이승[明]을 함께 나타낸 말이다. 저승과 이승이다. 말뜻 그대로는 ‘어두움과 밝음’이다. 그러나 낱낱의 말에는 속뜻이 있다. 특히 한자 낱말의 속뜻 보듬는 기능은 탁월(卓越)하다.
‘운명을 달리 한다’는 말은, 한번쯤 들어 본 듯한 이 단어 ‘유명’과 그 단어 ‘운명’을 착각(錯覺)한 결과이리라. 그런데 요즘 이 표현이 여기저기서 너무 자주 보여 혼란스럽다.
또 조심, 그 ‘유명’에도 동음이의어가 있다. 유명(幽冥)은 그윽하고 어둡다는 말, 즉 저승을 이른다. 혹시 한자로 써야할 경우에 ‘幽冥을 달리하다’라고 쓴다면 이는 틀린 표현이다.
이렇게, 한번 본 듯한 느낌에 기대어 멋을 좀 내 보겠다고 선택한 ‘문자(文字)’는 틀릴 확률이 높다. 그 확률의 수치, 실수할 가능성은 그 사람의 ‘문자 속’과 대충 비례한다. 사전의 도움 받으면 그 확률을 상당히 줄일 수는 있다.
하루 아침에 문자의 원리를 다 터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정비하고 앎의 곳간을 착실히 채워간다면 그는 ‘지식인’이 될 자격이 있다. 말이 흐리면 뜻도 흐리다. 흐린 뜻으로 밝은 지식을 만들 수 없다.
<토/막/새/김>
유명(有名)[유ː명]은 ‘이름이 널리 알려짐’을 이르는 유명한 유명이다. 젖이름 유명(乳名)은 아명(兒名) 즉 아이 때 이름, 유명(遺命)은 유언(遺言)처럼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에 남긴 명령이나 뜻이다. 유명(幽明)과 유명(幽冥) 말고도 ‘유명’은 그 갈래가 여럿이다. 게다가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인사유명(人死留名)이나 ‘늙은이의 눈이 오히려 밝다’는 노안유명(老眼猶明)같은 숙어(熟語), 법률용어 유명계약(有名契約)이나 논리학의 유명정의(唯名定義)에도 ‘유명’이 있다. 많다. 그러나 ‘유’자 ‘명’자 각각의 속뜻을 알면 덜 헷갈릴 터, 한자(漢字)의 존재감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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