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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

2010년 한국에 지식인으로서의 저널리스트는 없다.


…간단히 생각을 정리하면, PD 또는 기자라는 수식어와 상관없이 저널리즘은 오직 진실 추구의 과정적 실천 노력으로서 리포팅과 구별된다. 진실 복무에 태만한 기사·보도와 저널리즘은 본질적으로 전혀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 저널리즘’의 반대 개념으로 ‘PD 저널리즘’을 주창하거나, ‘PD 저널리즘’의 이념적 정파성을 들어 ‘기자 저널리즘’의 균형적 객관주의를 내세우는 논리를 수긍할 수 없다. PD가 만들건 아니면 보도국에서 제작했건, 진실을 탐사하는 실천으로서 저널리즘이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하다. 자발적 현실 취재 과정으로서의 저널리즘은 정보원이 제공하는 표피적 사실이나 확인조차 되지 않은 정보를 단순 릴레이하는 리포팅의 반대말로서 성립된다. 저널리즘은 주로 심층의 진실 발굴에 주목하고, 리포팅은 오직 표피의 사실 전달에 주력한다.

…방송 PD·기자의 ‘정치적 수행성’이란 진실 발굴과 그에 기초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한 공론(장) 생산 능력을 가리킨다. 신자유·신보수주의 자본국가가 지향하는 억압적 치안 상태에 맞선 자유로운 언론, 민주적 여론 매개자로서의 대의적 역할을 뜻한다. 따라서 방송 PD·기자의 정치성이 높아질수록 방송 보도의 사회적 가치, 즉 인민 대중의 일반적 교통(communications)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확보될 수 있다. 반대로 방송 기자·PD가 정치적 수행에 실패하면, 시민 다수의 교제 능력과 그에 기초한 민주적 사회 규제력도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리포팅이 악하고 저널리즘이 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권력이 제공하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리포팅이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권력에 반해 독자적으로 진실을 탐사·취재하는 저널리즘이 사회적으로 유리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악한 리포팅은 합리적 대중교통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궁극적으로 교통 대중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구조적으로 억압한다. 리포팅은 흔히 말하는 것과 달리 ‘민주주의=정치=사회’에 내려진 일종의 차단기이며, 심지어 권력의 홍보·선전 의지와 교묘하게 결탁함으로써 정치·사회를 불능 상태에 빠뜨린다.

…이것이 2010년 방송 보도의 진상이다. 한국 텔레비전에 저널리즘은 없다. 지식인으로서의 저널리스트도 없다. 전 사회를 관통하는 탄압 분위기, 마찬가지로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한 공포의 공통 감각, 그에 따른 낭패감과 무력감·보신주의 집단문화가 그 이유일 수 있겠다. 이 때문에 전적으로 기자를 탓하거나 PD를 욕할 수는 없다. 그래도 확실히 해둘 것은, 푸코가 말한,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진실을 소개하려는 자유언론의 실천은 텔레비전에서 완전히 부재하다는 점이다. 파르헤지아(parrhesia)의 정치 윤리를 자임하기에 오늘날의 방송 기자·PD는 너무나 무력하다. 바로 이게 현실이다.


-전규찬, '저널리즘의 무덤' 돼버린 방송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