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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게으른 사람은 싫어

반성

나는 왜 이걸 기사화할 생각을 못했을까... OTL


이은의

11월 25일 오후 8:29 · 수정됨 · 

나는 오늘 해임됐다. 여성가족부 법률지원변호사로서 봄부터 형사재판 중의 피해자를 지원해온 사건이었다. 과거 공론화되었던 사건이었고, 아직까지 결론이 안나고 1심 재판이 진행중이었다. 


오늘 제주도에서 택배를 받았다. 귀한 한라봉이 포장된 상자를 보는데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그저, 피해자가 제주도로 여행을 갔나보다 생각했다. 피해자의 재판이 진척이 안되고 자꾸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이라 추가 의견서를 한창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녁에 메일이 왔다. 피고인측이 피해자를 증인으로 다시 소환했고, 지칠대로 지쳐버린 피해자는 그 출석요구를 거부하면서 이 재판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변호인도 해임한다는 해임서를 같이 제출했다. 그 결심을 하러 여행을 갔고, 거기서 미안하다며 내게 선물을 보냈다. 여행갔나보다, 맛있겠구나, 고맙구나 했던 한라봉은, 여린 피해자가 힘들게 버텨온 재판을 포기하며 보낸 눈물의 상자였다. 


부끄럽게도 피해자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하고 있는 줄 몰랐다. 안쓰러우면서도 강해 보이는 사람이라 그저 잘 버텨주는게 대견하고 고마왔다. 내색없이 속앓이를 하면서 피해자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지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하고 억장이 무너진다.


쓰던 의견서를 폐기하고, 피해자의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변호사였던 여성으로서 재판부에 탄원서를 쓰기로 했다. 초안을 잡느라 피해자가 직접 쓴 불출석 의견서를 읽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출구없이 무너진 피해자의 착한 통곡을, 이 의견서를 받은 재판부도 이 글을 읽는 다른 동료 변호사들도 느껴주면 좋겠다. 절차도 좋고 피고인을 위한 변론도 좋지만, 피해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지, 다함께 고민하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


성추행 피해여성 수치심 주는 증인신문…“2차 피해 막기위한 변호사 지침 만들어야”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720481.html


이은의

12월 5일 오후 11:33 · 수정됨 · 

전 제 이름 쓰셔도 된다고 동의드렸었는데 오후에 기사가 수정되면서 ㄱ변호사가 되었내요. 왜 제가 ㄱ변호사로 기사가 변경되었는지 궁금하지만...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기사는 기자에게.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죠. 엄지원 기자님 기사에서 뭔가 마음고생 많으셨던 행간이 읽혀 마음이 쓰입니다. 

그래도.. 자기 변호사 해임서를 스스로 던지며 재판포기 선언했던 피해자가 이 기사 보면서 다시 힘을 냈습니다. 그래서 일단 선고만 남은 1심은 이대로 탄원서로 마무리 하되 항소심은 제가 다시 맡아 피해자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기사 하나가 세상을 바꿔놓을 순 없더라도 누군가의 지친 어깨를 두드려 격려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를 바꾸는 건 그렇게 힘낸 당사자들이겠죠...그래서 언론이 역할에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 믿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 피해자 사건을 취재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해자가 다시 힘을 냈다는 소식 전해드리고 싶어서 몇자 여기 적었습니다. 덕분에 다시 제 책상으로 돌아온 이 사건, 피해자 손 끝까지 잡고 가보겠습니다. 건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