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펜 끝을 벼리다

함께 꾸는 따뜻한 꿈, ‘집’ 제23호 中 스타빅돔 아키바 리에 “이젠 신라면이 안 매워요.” 그녀는 곱창과 소주, 삼겹살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어가 너무 아름답고, 가족과 친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문화를 배우며 성숙해진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의 맛, 말, 마음을 사랑하는 일본인 아키바 리에. 그래서였을까? 일본이 아닌 한국판 에 재능을 기부하고, 도쿄가 아닌 서울 신사역 8번 출구 앞에서 “안녕하세요, 빅이슈입니다!”를 외치는 그녀의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이날 ‘스타빅돔’을 함께 한 오랜 친구 사와씨 말대로라면 ‘12년 전 그대로’인, CD만한 얼굴 크기 외에는. 시야는 넓게, 생각은 깊게 하는 법을 배운 시간들 스무 살의 어느 날, 리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이랑 함께 살던 때에는 휴지 .. 더보기
희망버스에 시동이 걸리기 전에 “보고 싶은 걸 보고, 그만큼만 안다.” 영화 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통념을 이렇게 뒤집는다. 한날 한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은 서로를 전혀 다르게 기억한다. 남자는 ‘여성스럽고 차분한 그녀’만, 여자는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모는 부유한 그’만 알고 있다. 서로 보고 싶은 상대방의 모습만 기억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매사가 그렇다. 한진중공업사태와 희망버스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억 또한 제각각이다. ‘기업 경영이 어려우면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는 이들은 200여일째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내려올 때라고 말한다. 지난 2차 희망버스 방문 때 밤새도록 시민과 경찰이 대치해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영도 주민, 휴가철 대목을 앞둔 상인들의 반대 목소리도 .. 더보기
한국에 괴물이 산다. 2009년 한국에 괴물이 산다 한강, 아니 한국에 괴물이 산다. 엉뚱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그 괴물은 매우 덩치가 크다. 우리가 괴물을 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이유다. 또 이 괴물은 5천만명 가까이 되는 한국인들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다. 덩치가 크고 힘이 셀 뿐 아니라 카멜레온처럼 겉모습도 다양하게 바뀌기 때문에 괴물의 실체는 물론 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채 사람들은 살고 있다. 2009년 현재 한국을 지배하는 괴물의 첫 번째 모습은 ‘취업’이다. 청년실업이 100만에 육박하는 요즘, 20대는 토익 점수를 높이고 인턴과 해외연수 등의 경험을 쌓는 등 스펙 쌓기에 급급하다. ‘스펙 괴물’이 되지 않으면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세상이다. 사람은 물론 땅도 괴롭다. 전.. 더보기
장마만큼 우울하고 변덕스러운 것? 고무장화를 마지막으로 신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일이다. 친구들도 비슷한 줄 알았다. 하지만 비 오는 토요일에 만난 친구는 알록달록한 색깔에, 그림까지 그려진 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그녀만 신는 게 아니었다. 초록색, 보라색, 빨간색 장화를 신은 사람들은 지하철에도, 명동에도 많았다. 어린 시절 신고 다닌 노란색 고무 장화, 농사 짓던 할아버지의 남색 장화만이 그 세계의 전부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장마 때문이다. 예년보다 일찍 시작한데다 기간도 길어져 발이 젖지 않고 개성을 뽐낼 수 있는 '패션장화'가 인기상품으로 등극한 것이다. 구멍이라도 뚫린 듯 계속 내리는 비를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기도 하다. 가만 보면 장마는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닮아 있다. 우중충한 하늘빛, 멈출.. 더보기
돌멩이도 순서대로 치워야 새의 부리는 너무 뾰족했다. 병 속 물을 먹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새는 병 안에 작은 돌멩이를 하나 둘 넣었다. 돌의 부피 때문에 물이 점점 올라왔고, 새는 마른 입을 시원하게 적실 수 있었다. 새 학기 등록금을 마련 못 해 전전긍긍하던 후배에게 학자금 대출은 '돈'이란 병 속 물을 먹게 도와줄 '돌멩이'였다. 하지만 갈증을 해소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돌멩이들은 빚으로 남았다. 힘들게 취업한 그에게 "이제 돈 잘 벌겠다?"고 했다. "학자금 대출 갚고 나면 남는 것도 없어요." 뉴스에서는 학자금 대출이자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대학생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때마침 나왔다. 연간 등록금 1000만원 시대의 어느 저녁이었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반값등록금’이란 다섯 글자가 여의도를 흔.. 더보기
'정육점'에선 고기를 팔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을 정육점이라고 했다. 선홍빛 조명이 공간을 밝히는 모습이 비슷했다. 짓궂은 남자애들은 '체육관'이라고도 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연히 차를 타고 '그곳'을 지날 때면 부모님은 대낮이어도 창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머리가 조금 굵어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집창촌'이라고 했다. '19세 미만 청소년 출입금지구역'이란 푯말이 놓여 있었다. 출입금지 대상이 아닌 지금도 '그곳' 근처를 지날 때면 여전히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불안감은 호기심이 됐다. 내 또래가 있을까? 어떤 옷을 입고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호기심은 늘 편견에 졌다. 기름과 물처럼 섞일 수 없는 곳이라며, 거긴 또 하나의 '섬'일뿐이라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지난 3월 서울 영등.. 더보기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몇 주째 베스트셀러 1위인 책이다. 청년실업 100만 시대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88만원 세대를 위로하려 쓴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글에서 많은 이들이 위안을 얻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권위 있는 누군가가 말해야 ‘그래, 그렇지’라고 끄덕이는 현실, 그것은 ‘아픈 청춘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의 역설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에 수십만 독자가 공감하는데도 매년 대학생 300명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국 최고 과학 영재들이 모였다는 카이스트도 예외가 아니다. 석 달 만에 학생 넷이 세상을 등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누구도 섣불리 이유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징벌적 등록금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카이스트 대개혁’을 외치며 취임한 서남표 총장은 일정 점수 이하 학.. 더보기
삶의 시작과 끝은 곧 글쓰기 지난해 4월 저널리즘특강 과제로 썼던 기사. 폴더 정리하다가 오랜만에 다시 봤다. 기사는 어설프지만 글쓰는 사람으로서 내용은 곱씹어야해서 블로그에 쾅 박아 둔다. 저작권은 나한테 있으니까 내맘대로 ㅎㅎ * 참고로 김광일 기자님은 현재 논설위원. “행복과 연봉, 배우자의 외모. 모두가 얼마나 글쓰기를 잘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지난 9일 오후 조선일보사에서 만난 김광일 부국장 겸 국제부장은 “꼭 ‘남대문 상인’이 광고하듯 말하지 않느냐”며 하회탈이 되었다. 안경테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만 달랐다. ‘25년 동안 기자로 살며 터득한 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곧 하회탈이 사라졌다. 김 부국장은 이제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도 지금 글쓰기의 중요성을 느끼지만, 10년 후면 더 뼈저리게 느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