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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희망버스에 시동이 걸리기 전에

지난20일 사측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간 85호 크레인과 같은 규모의 84호 크레인을 옮겨와 로프로 연결해놨다. ⓒ 오마이뉴스


“보고 싶은 걸 보고, 그만큼만 안다.” 영화 <오! 수정>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통념을 이렇게 뒤집는다. 한날 한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은 서로를 전혀 다르게 기억한다. 남자는 ‘여성스럽고 차분한 그녀’만, 여자는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모는 부유한 그’만 알고 있다. 서로 보고 싶은 상대방의 모습만 기억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매사가 그렇다. 한진중공업사태와 희망버스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억 또한 제각각이다. ‘기업 경영이 어려우면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는 이들은 200여일째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내려올 때라고 말한다. 지난 2차 희망버스 방문 때 밤새도록 시민과 경찰이 대치해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영도 주민, 휴가철 대목을 앞둔 상인들의 반대 목소리도 높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본 김진숙과 영도, 기억하는 한진중공업 사태와 정반대다.

분노.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다. 400명의 정리해고를 감행하며 회사는 “지난 2년 간 영도조선소는 단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조선업계 사정도 예전과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 지은 필리핀 수비크 조선소는 잘 나간다. 규모만 세계4위다. 값싼 노동력 등 좋은 여건덕분이라지만, 내부적으로 일감을 몰아준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전체 노동자의 20%를 내쫓은 다음날, 회사는 주주들에게 174억원을 배당하고 임원들의 연봉을 50% 인상했다. 의혹의 눈덩이가 커질 수밖에 없다. 설령 아니라 해도, 선박 수주 유치는 배를 만드는 사람 일이 아닌 파는 사람 몫이다. 그러나 자본은 철저히 책임은 피하고, 이익은 챙겼다.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정당했다. 그 분노가 평범한 회사원, 교사, 대학생들이 희망버스에 오르게 했다. 

ⓒ한겨레 21

 
김진숙과 영도조선소에서 본 것은 그들 자신이기도 했다. 경쟁에 한 없이 내몰리는 사회, 일하는 사람의 절반가량이 비정규직인 현실은 불안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여전히 부족한 사회 안전망은 그 불안을 더욱 키우고 있다. 월급봉투가 없으면 아이들 학원비를 감당할 수 없고, 노부모 병원비 역시 큰 짐이 된다. 온가족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 일상은 꿈으로 남는다. 학교 공부보다 학원이 우선이고, 공공보험 보장률이 낮아 민영보험 가입은 필수인 세상이다. 안정한 삶을 꾸려는데 필수조건이 바로 ‘직장’이다. “해고는 살인”이라 외치는 농성자들, 35m 상공에 매달려 “조합원들에게 일상을 돌려달라”는 김진숙에게서 사람들은 봤다. 그들이 꿈꾸는 평범한 삶, 그들이 시달리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것은 곧 우리의 꿈, 우리의 불안이었다. 1만여명의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서 희망버스에 몸을 싣고 영도를 찾게 한 ‘외부세력’은 바로 ‘공감’이었다.

‘분노’와 ‘공감’을 보지 못하면 희망버스를 알 수 없다. 이미 파업이 끝났다는 말이나 희망버스가 아니라 주민 괴롭히는 ‘훼방버스’라는 비난으로 달리는 버스를 멈추기 어렵다. 그들이 영도에서 목격한 분노와, 해고자의 눈물에서 느낀 공감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알자지라, CNN, BBC 등이 다루고 국회에서 청문회를 추진할 정도까지 됐다. 한진중공업은 더 이상 ‘노사문제’가 아니라 ‘정치‧사회문제’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시민들의 불안한 삶을, 몰염치하고 폭압적인 자본에 대한 분노를 변화시킬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한진중공업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그 첫 단추다. ‘빨갱이, 외부세력, 훼방꾼’으로만 희망버스를 보면 답이 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그만큼만 서로를 알고 이해했던 <오! 수정>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어정쩡하게 끝난다. 세상은 영화와 다르다. 엇갈린 시선과 기억은 갈등의 골을 깊게 하고 대립의 각을 날카롭게 한다. 더는 희망버스로만 풀어나갈 일이 아니다. 국가의 노력이, 법과 제도의 힘이 필요하다. 3차 희망버스에 시동이 걸리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