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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 모두 절반만 기억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 그와 잦은 다툼이 있었던 몇 달 동안 가장 많이 생각했다. A라는 일로 싸우게 됐을 때 그 상황을 이끌어가거나 혹은 해결하는 방식이 우리는 참 달랐다. 마무리 짓고 종료된 이후에도 비슷했다. 흔히 남자는 뒤끝이 없다고 한다. 여자는, 그 이후에도 당시 분위기와 했던 말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곱씹어 보게 된다. 한 마디로 뒤끝이 있다. 물론 이런식의 구별짓기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 편이지만, 점점 공감대가 형성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들 중 하나(One of them)'인 게 확실하다.

'오! 수정(2000)'은 '그들'을 보여주는 영화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뿐 아니라 기억도 다르다.



"소주는 다섯 병, 양주는 세 병 정도 마셔요"라고 남자가 말한 곳은 어딜까? 여자가 "우리 제주도 가요"라고 말한 때는 언제일까? 수정(이은주)와 재훈(정보석)이 기억하는 시간과 공간은 제각각이다. 영수(문성근)와 함께 술을 마시던 날, 재훈은 탁자 아래로 떨어진 젓가락을 주웠지만 수정은 식탁 위 냅킨으로 술에 젖은 옷을 닦았다. 서로 기억하는 모습도 다르다. 남자는 첫 만남에서, 수정의 머리매무새를 만지는 영수를 기억하지만 여자는 재훈의 운전기사를 봤다. 만남이 반복돼도 마찬가지다. 기억하는 말 역시 다르다. 서로 반쪽짜리 기억으로, 반쪽짜리 이미지로 남아 있다. 결국 서로 보고 싶었던 모습, 듣고 싶었던 말들만 기억한다는 거다.



보름 전 '아마존의 눈물'을 만든 김현철 MBC PD를 만났다. 지금까지 제작했던 몇몇 프로그램들을 보여주며 그는 객관이란 게 뭘까 고민했다는 말을 꺼냈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주관적인 게 가장 객관적이다"였다. 그 고민과 결론을 간직한 채 김 PD는 '절반의 기억, 2002년 6월 13일'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미군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깔려 숨졌던 그 날, 2002년 6월 13일의 기억은 저마다 달랐다.

'오! 수정'이나 '절반의 기억, 2002년 6월 13일'이나 우리의 삶이나 다 비슷하다. 기억하는 것은 단순하다. 내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는 형태로 뇌리에 남은 것, 모두가 반쪽짜리 기억을 갖고 살아간다.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 또한 절반의 기억으로 연애를 하다가 절반의 기억으로 싸운다. 생각해보면 그와 내가 다툴 때도 비슷했다. 책임 소재를 묻는 가장 큰 이유는, 각자의 기억 속에서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차지하는 부분은 적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더 상세히 기억한다. '넌 늘 이런 식이었어'란 말이 제일 먼저 나온다. 화법이 다른만큼 기억이 다르고, 각자 논리를 뒷받침하는 기준이 제각각일수밖에. 그러다보니 시시비비를 가리려 할수록 도리어 싸움만 커졌다.

그럼 답은 '포기'이어야 할까?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의 반쪽짜리 기억을 알 수 없고 서로의 빈 기억을 채워줄 수 없으니 각자 제 갈 길 가야 하는 걸까?

아직까지 내린 결론은 'No'이다. 때론 톰과 제리처럼 쫓고 쫓기는 애증의 관계같기도 하고, 때론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외계 생명체처럼 바라볼 때도 있지만, 끝맺을 생각과 의지가 없다면 할 수 있는 한 '끄덕'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정이 돈 많고 매너 좋은 찌질남 재훈과 결국 섹스하기로 맘먹은 것도 일단 '포기'는 유예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여전히 그 남자는, 흰 이불을 수놓은 처녀의 상징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찌질남이지만 말이다. 애초부터 서로 온 별이 다르고, 서로 기억하는 하루와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해도 일단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건 당신이니까. 나를 보고 있는 것도 당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