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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루시드 폴을 들으며


10. 그 이야기가 청자에게 어떤 의미였으면 좋겠나.
루시드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청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는 생각을 하고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위로하는 곡을 써야지, 뭔가 비판하는 곡을 써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 헛힘이 들어갈 거 같다. 쓰고 싶은 이야기 쓰면 되는 거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맞는 거 같다.



고등학교에 대한 기억은 그닥 화사하진 않다. 학교에서 괴롭힘에 시달렸다거나 집이 쫄딱 망했다는 드라마틱한 사연 때문은 아니다. 사춘기 소녀라면 그렇듯 무얼하든 슬펐고, 아팠다. 그때엔 그랬다. 독(毒)을 품고 오기로 버티면서도 늘 외로웠다. 그 시절,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하나 둘씩 찾아갔다.

제일 좋았던 두 가지는, 83번 버스를 타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는 것과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던 남산의 흐트러져 있던 노랗고, 빨간 가을을 볼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와아-'란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본 서울의 야경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낯설고 감동적인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점에 다녀오는 길이 내겐 큰 행복이었다.

또 다른 'My favorite thing'이었던 음악. 참 잡다하게 들었다. 규칙과 취향 따윈 존재하지 않았고, 그냥 귀에 꽂히고 가사가 마음에 남으면 그건 그냥 '내 노래'였다. 루시드 폴도 그렇게 만났다. 1집 수록곡 '새'를 들으며 참 많이 들었다. 감정적으로 우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이 뒤섞여 있던 때여서 그랬을까. 이규호의 가는 목소리가 "새벽녘 내 시린 귀를 스치듯"을 읊조리면,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고 아팠지만 어딘가 모르게 따뜻해졌다. 그러고보면 그때 제일 좋아했던 또 다른 노래도 전람회의 '새'였다. 두 곡 다 날 참 많이 울린 노래다.

언젠가부터 폴은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 됐다. '음악하는 과학자'라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나도 한때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한 꿈이지만, 앞으로 직업으로 삼을 일이 '팩트'에 기초한 글인데 비해 예전에 꿈꿨던 글쓰기는 그저 진솔함이 담긴, 조근조근히 이야기를 하는 그런 글을 쓰는 일이었다. 이건 만들어진 편견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때엔(지금도 약간) '이공계'란 현재의 위치는 내가 꿈꾸는 일을 하기엔 어떤 핸디캡이 된다고 여겼다. 그 편견을 조금 지워졌던 사람이 폴이다. 그래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2008년, 어느 인터뷰에서 "전업 음악가에 대한 공포가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던 폴은 결국 전업 음악가로 돌아왔다. "근데 웃긴건 나이를 먹으니까 오히려 전보다 조금 더 용감해지는 것 같다"며 '노래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그냥 '노래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 '노래하는 사람, 조윤석'의 첫번째 앨범이 바로 4집 레미제라블이다.

나는 음악을 듣는 귀가 고도로 발달한 사람이 아니고, 때론 멋모르고 기타 소리를 베이스로 착각하며 더구나 요즘엔 예전만큼 음악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평가'를 할 수 없다. 그냥 내가 느낀 '감흥'을 풀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는 내가 왕인, 내 블로그니까 이 글은 이렇게 쓸데없는 과거의 이야기부터 뒤죽박죽 섞여 길게 늘어지고 있다.

유희열은 폴의 노래가 사람들의 '약'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폴의 노래에서 위안을 받기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어떤 본연의 슬픔, 평상시엔 감추고 있던 그 예민한 촉수가 다시 움직이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슬퍼진다. 이번 앨범도 그랬다. 물론 '고등어'나 '문수의 비밀'처럼 재밌게 들을 수 있는 노래도 있지만, 결국 귀에 남는 노래는 '레미제라블'이나 '외톨이' 같은 곡들이다. 근데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고 느껴지는 건, 슬픈 가사를 전달하는 멜로디는 오히려 더 밝아졌달까? '애이불비'의 정서라기보다는, 멜로디의 반어법같다.
 
앨범을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폴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고 했다. 나는, '쓰고 싶은 이야기'만 쓰긴 힘들거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 기사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기 어렵다. 어떤 식의 표현으로든, 타인에게 공명을 준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나 기사는 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있는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싶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다. 그건 많이 어려운 일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