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펜 끝을 벼리다/쇠뿔부터 빼고보자

판사 마음 움직이는 탄원서

너무 무겁지 않고, 적절히 시의성을 띠면서 흥미로운 아이템은 역시 중앙일보가 잘 찾아내는 듯. 탄원서만으로 기사 한 꼭지라.. 잘 참고해야겠다.


======================

http://joongang.joins.com/article/917/15938917.html?ctg=1200&cloc=joongang|home|newslist1

판사 마음 움직이는 탄원서

[중앙일보] 입력 2014.09.27 01:19 / 수정 2014.09.27 01:20

가족이 쓴 절절한 사연 "글쎄"… 동료·지인의 솔직한 글 "그래"


“집사람은 정말 불쌍합니다. 언니는 소녀 가장이었습니다. 제가 평생 아끼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 번만 선처해주시면 행복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법원에 근무하던 A판사는 친언니와 힘을 합쳐 형부를 죽인 한 여성 피고인의 남편이 낸 탄원서를 접했다. 내심 언니에겐 징역 12년을 선고하기로 결정해 놓고 공범이자 성폭행 피해자였던 동생의 양형을 두고 고심하던 터였다. 절절한 사연이 담긴 탄원서를 다 읽은 A판사는 동생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세 자매는 언니가 결혼한 후에도 함께 살았다. 행상을 하던 형부는 집에 올 때마다 언니 몰래 고등학생인 두 여동생을 성폭행했다. 동생들은 언니가 불행해질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년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언니의 분노는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외치며 남편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동생은 의자에 묶여 있던 형부를 때리면서 범행을 도왔다.

 A판사는 “남편이 눈물로 쓴 탄원서는 진심이 느껴져 뭉클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탄원서였다”고 말했다.

 법조계엔 “잘 쓴 탄원서가 변호사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감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이재현 CJ그룹 회장 항소심에서 삼성가 가족들이 제출한 탄원서가 화제가 됐다. 재계 관계자는 “재계 인사의 재판에 거의 의무적으로 제출되는 전경련 탄원서와 달리 실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기대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않아 CJ 측 인사들이 아쉬워했다”고 전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 선동·음모 사건에서도 선고를 앞두고 4대 종단 고위 성직자들이 한꺼번에 탄원서를 제출해 논란이 됐다. 재판부는 선고를 하면서 이례적으로 “법에 따라 선고했을 뿐 종교계의 탄원서는 감안하지 않았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탄원서는 한마디로 “내 말 좀 들어달라”는 하소연이다. 법적인 증거능력은 없지만 판사가 사건의 이면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매번 효과가 나는 건 아니다. 일방적인 주장만 할 때,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일 때 오히려 역효과라고 한다. 판사들은 “솔직히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절대 다수의 탄원서는 별 감흥을 주진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마음을 움직이는 건 어떤 탄원서일까.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판사들이 제일 집중해서 검토하는 탄원서는 피해자의 탄원서다. 피해자가 엄벌을 요구할 때 이는 양형에 고려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피해자가 선처를 구해도 유심히 봐야 한다. 혹시 강압으로 제출한 것은 아닌지를 따져본다. 억울한 피해자가 직접 쓴 탄원서는 사건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피고인·가해자를 위해 탄원서를 쓸 때엔 사실에 입각한 정보가 많을수록 유리하다. 지나친 자기 변명, 앞뒤 따지지 않고 두둔하는 태도, 추상적인 반성도 탄원서 효력을 떨어뜨린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피고인을 위해서는 주로 가족들이 많이 쓰는데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절절한 사연도 있고 남 일 같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양형 결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족보다는 오히려 한 발 떨어져 지켜본 회사 동료, 지인들의 탄원서가 설득력이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특히 솔직함이 가장 중요하다. 진짜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이 드러나도록 나만 알 수 있는 디테일에 신경을 쓰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자필로 쓰는 게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악필이라면 차라리 워드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