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펜 끝을 벼리다/쇠뿔부터 빼고보자

재판 사건번호의 숨겨진 비밀

http://joongang.joins.com/article/278/14140278.html?ref=mobile&cloc=joongang|mnews|pcversion


건국 이후 최초 사건번호


대한민국 건국 이후 선고된 최초의 사건번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에 선고된 ‘서울지방법원 1948민 제1308’ 대금청구 사건이다. 안성군 일죽면에 사는 최모씨가 고양군 독현도면에 사는 임모씨를 상대로 제기한 사건이다.


당시 돈 ‘1만원’을 빌려줬는데 임씨가 갚지 않자 최씨가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재판부인 서울지방법원 민사 제2부 고윤후 판사는 “피고는 원고에 대하여 1만원을 1948년 4월 1일 이후 모두 갚을 때까지 2할의 이자를 합산해 갚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사건번호는 근대 사법제도가 확립된 이후 일본의 제도 등을 참고해 부여돼 왔다. 이후 1961년 조진만 대법원장이 ‘법원공문서규칙’을 공포하고 1964년 ‘판결서양식’을 제시하면서 현재 형태의 사건번호가 확립됐다.


이현복 대법원 홍보심의관은 “개화기 이후 도입된 근대적 사법제도에 따라 사건번호가 부여된 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현재의 체제가 확립됐다”며 “과거에는 사건부호가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사건 수와 종류가 폭증하면서 다양해졌다”고 설명했다.


연도와 사건부호, 접수번호의 조합


2004년 3월 30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첫 공개변론 모습 ⓒ 중앙일보


대법원 재판예규인 ‘사건별 부호문자의 부여에 관한 예규’ 등에 따르면 사건번호는 연도와 사건부호, 접수번호 순으로 구성된다. ‘2014고합1234’라는 사건 번호에서 2014는 해당 소송이 제기된 연도를 뜻한다. 고합은 형사 합의사건을 의미하는 사건부호이며 1234는 접수된 순서를 말한다. 앞에 붙는 연도는 2000년대 이전까지는 ‘99’ 등의 두 글자만 사용됐으나 이후에는 네 글자를 모두 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사건번호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사건부호다. 지난해 기준 총 162개의 사건부호가 실제 재판에서 사용됐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민·형사사건을 놓고 보면 어떤 부호를 쓰는지에 따라서 1~3심 중 어느 심급인지를 파악할 수 있고 민·형사 등 사건의 종류도 구별할 수 있다.


심급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앞자리 글자를 보면 된다. 통상적으로 ‘ㄱ’은 1심, ‘ㄴ’은 2심, ‘ㄷ’은 최종심을 뜻한다. 형사사건의 경우 1심에서 최종심까지 ‘고, 노, 도’ 순으로 앞글자가 구성된다. 민사사건은 ‘가, 나, 다’ 순이다. 행정사건은 ‘구, 누, 두’를 사용한다.


1심 사건에서 뒤에 붙는 글자는 합의사건인지 단독 사건인지 등을 알려준다. 형사사건은 단독 판사가 담당하는 ‘고단’ 사건과 세 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합의부가 재판하는 ‘고합’ 사건이 있다. 약식사건에는 ‘고약’이 쓰인다. 민사사건에서도 ‘가합’ ‘가단’ 사건이 있고 형사사건의 약식사건에 해당되는 소액사건을 뜻하는 ‘가소’도 사용된다. 가사사건의 경우 민·형사 사건과 다르게 1심은 ‘드단’과 ‘드합’을 2심은 ‘르’, 상고심은 ‘므’를 사용한다. 재심사건인 경우 ‘재’라는 부호를 앞에 붙인다.


사건번호는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역할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에 처음으로 접수된 형사사건은 ‘2013고합1’ 사건이다. 하지만 민사사건의 경우 ‘2013가합15’가 첫 사건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접수번호는 기본적으로 접수된 순서를 뜻한다. 하지만 민사사건의 경우에는 사건의 전산처리를 위해 맨 뒷자리에 검색용 숫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건번호 뒤에는 사건명이 붙는다. 형사사건은 ‘살인’ ‘강도’ 등 죄명이, 민사사건은 ‘대여금’ ‘소유권 이전 등기’ 등이 기재된다. 손해배상 같은 경우에는 사건명 뒤의 ( )안에 손해배상의 종류를 쓰기도 한다. 자동차 등 교통사고 관련 사건은 ‘(자)’, 업무상 재해는 ‘(산)’, 의료사건은 ‘(의)’가 붙는 식이다.


그렇다면 사건번호는 소송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하다. 사건번호를 통해 자신의 사건 진행 상황을 추적할 수 있다. 해당 사건에서 제출된 서류의 종류와 변론기일이 언제 열리는지 등 각종 정보를 법원 홈페이지 ‘나의 사건검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건의 동일성 유지를 위해 한번 부여된 사건번호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헌재와 검찰도 각기 다른 사건번호 사용


헌법재판소는 일반법원과 다른 사건번호를 사용한다. 연도와 사건부호, 일련번호 순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같다. 하지만 법원에서 사용하지 않는 사건부호를 쓴다.


앞글자에는 헌법재판소를 뜻하는 ‘헌’이라는 글자가 들어가고 뒤에는 사건 종류별로 ‘가나다라마바사아’까지의 글자가 덧붙여진다.


‘헌가’ 사건은 위헌법률 심판 사건이다. 법원에 소송을 낸 사람이 재판이 계속 중인 상태에서 해당 법률의 위헌성 여부를 심사해 달라며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하면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헌재에 제기하는 사건 등에 부여된다.


‘헌나’ 사건은 탄핵사건을 말한다.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사건번호만 남아 있다. ‘2004헌나1’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사건에 부여된 번호다. 정당해산심판청구에 부여되는 ‘헌다’ 사건부호도 단 1건만이 부여됐다. 법무부가 청구한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청구 사건의 ‘2013헌다1’로 현재 심리가 진행 중이다.


‘헌라’는 국가기관 또는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벌어진 권한 다툼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심판하는 ‘권한쟁의심판’에 부여된다. ‘헌마’는 헌법소원 사건에, ‘헌사’는 국선대리인 선임신청 때, ‘헌아’는 헌재의 결정이 잘못됐다며 재심을 청구하는 사건에 쓰인다.


검찰 수사 단계에도 사건번호가 부여된다. 가운데 사건부호는 ‘형제’를 사용한다. 기소된 뒤 법원으로 사건이 넘어오면 법원의 형사 사건번호가 부여된다.


미국, 독일, 일본도 유사한 사건번호 사용


‘3:13 CV-00265-HEH’. 암호 같아 보이지만 이 번호는 미국에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의 사건번호다. 근대 사법제도가 미국·독일 등에서 확립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온 만큼 사건번호의 형태도 미국과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앞에 붙어 있는 ‘3’은 해당 법원의 고유코드다. 국내 법원의 사건번호 앞에 법원명이 붙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법원별로 코드를 갖고 있는데 이 사건은 버지니아 주 법원 사건이다. 뒤에 붙어 있는 13이라는 숫자는 연도를 의미한다. ‘CV’는 사건부호로 민사사건을 의미한다. 형사사건의 경우 ‘CR’을 사용한다. ‘00265’는 접수번호다. 해당법원에 265번째로 접수된 사건이란 뜻이다. 맨 마지막에 붙어 있는 ‘HEH’라는 약어는 담당 법관의 이름으로 이 사건에서는 해리 이 허드슨(Harry E. Hudson) 판사를 뜻한다. 법원에 따라서 법관 명을 붙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황성돈 법무법인 세종 선임외국변호사는 “영화에서 보면 ‘○○ 케이스’라는 식으로 사건명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일부 유명한 사건들에 대해 언론 등에서 편의상 붙인 이름을 활용하는 것”이라며 “원칙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유형의 사건번호 체계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독일도 알파벳 글자와 숫자 조합으로 된 사건번호를 사용한다. ‘LG Berlin 24 O 13/04’라는 사건번호를 예로 들면 앞에 쓰인 ‘LG Berlin’은 베를린 지방법원을 뜻하는 약어다. ‘24’는 해당 재판이 진행되는 재판부 코드이며 ‘O’는 지방법원의 1심을 말한다. ‘13’은 연도를, ‘04’는 접수번호를 의미한다.


일본도 유사하다. 오사카 지방재판소, 나고야 지방재판소 등의 법원명이 앞에 들어간다. 그 다음에는 연호를 쓰며 사건부호와 접수번호가 붙는 순이다. 일본법 전문가인 세종의 박세길 변호사는 “서구의 근대적 사법시스템이 일본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던 만큼 사건번호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며 “다만 일본은 우리보다 사건부호의 종류가 더 세분화돼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