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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그렇게 살고 있다. 가운을 둘렀다가 다시 벗고 3천원을 지불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분, 기다린 시간은 55분. 유난히 내리쬐는 햇볕 탓에 덥기도 했지만, 고작 5분이면 끝날 일을 1시간 가까이 기다리며, 그것도 아무런 기약없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매우 불쾌했다. 앞머리만 자르면 됐다. 일요일 오후의 미용실은 붐볐기에 조용히 앞머리만 자르고 갈 수 있길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내게 '뭐 하러 오셨어요?'라고 묻지 않았다. 바빴으니까.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 바늘만 보다가 결국 짜증섞인 말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걸린 시간이 총 1시간. 어이없는 일로 아까운 시간만 날려보냈다는 생각에 마음만 불쾌했다. 그나마 남은 건 20~30분 동안.. 더보기
청승 맞은 이야기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친구가 있다. 감기. 쉽게 추위를 타는 체질인지라 얇은 카디건류는 꼭 챙기는 편인데, 며칠 전 깜빡 집에 두고 나온 날, 과하게 시원한 지하철을 2시간 가까이 탔더니 냉방병과 감기가 완벽한 조우를 했다. 그냥 기침만 하고 콧물 좀 나오는 수준이면 모르겠는데 열이 났다 안 났다 한다. 문제는 그때마다 어지럼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다는 것. 이틀 전에는 머리가 너무 무겁고 온몸이 뜨거워 나도 모르게 울어버렸다. 가을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유독 이 계절이 돌아오면 마음이 어지럽다. 냉정과 열정,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도 이 때만 되면 평형감각을 잃어버린다. 현재 진행형이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여려진다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합리화하고 싶다. 다시 시.. 더보기
뜬금없이 생각난 빨간 도깨비 "아..아가씨"라고 하는 건지, 아님 아줌마 혹은 아저씨인지 구분할 수 없을만큼 목소리가 작고 힘이 없었다. 지하철이 쏟아낸 사람들 무리 속에 뒤섞여 계단을 오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울듯 말듯한 얼굴의 그 할머니를 지나치며 개찰구를 나설 때, 참 뜬금없게도 '울어버린 빨간 도깨비'란 동화가 생각났다. 어린시절 엄마는 여느 집처럼 세계아동문학전집, 한국아동문학전집 등 전집시리즈를 장만해 책꽂이를 채워주셨다. 하지만 무겁고 재미없어 뵈는 전집보다 가벼운 단행본이 더 눈에 들어왔다. 4학년 쯤이었을까? 새로운 책을 사 읽는 것도 살짝 싫증났을 무렵, 책꽂이 한 켠에 우두커니 놓여 있던 그 전집 중 하나를 빼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주인공이 뭐였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유독 삽화까지 생생하게 기억나.. 더보기
몸이 변해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인식을 의미하는데, 앞에 말한 것처럼 이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발생한다. 알이 부화하여 나비가 되는 것처럼, 몸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고통을 뜻한다. 금연,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관계·초콜릿·카페인·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등 보통 사람들의 수많은 결심과 계획이 대개 실패하는 것처럼, 자기 변태는 너무도 어렵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에 올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어렵지만, 모든 변태는 의미를 생산한다. 의식화는 '변절'이나 '전향'이 가능하지만, 변태는 형태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의식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변절'이 불가능하다. .. 더보기
나는 불행하지 않다, 불쌍하지도 않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불쌍하지도 않다. 다만 지금의 일상이, 꿈꾸며 기다리는 삶이 꼭 부나방같아서 살짝 지칠 뿐이다. 의 레오가 배고픈 천사에게 지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나는 '무기력한 천사'와 싸우고 있다. 삽질 1회 = 빵 1그램 이라면, 자기소개서의 1단어 = 지구력 1그램이다. 배고픈 천사는 레오의 숨그네를 제멋대로 뛰게 만들지만, 무기력한 천사는 나의 숨그네를 뛰지 못하게 만든다. 더위 탓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만은 없다는 걸 안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불쌍하지도 않다. 다만 조금 지쳤을 뿐. 더보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독한 추위, 거대한 영향력, 치밀한 생명력. 이런 환경은 당신의 책 취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완벽주의 침엽수림: 잘 짜여진, 정확한, 완벽한 내용의 책을 선호. 기술적으로 깊은 내공을 지닌 작가의 글을 선호. 거만한 알래스카 동절기: 책의 인기도, 판매량 순위 등에 거의 관심이 없음. 뻔한, 똑같은, 평범한 내용을 경멸함. 진실된, 심오한, 정교한 내용을 선호. 이중적 순록떼: 의외로 극단적이고 무례한 내용에 너그러운 편. 나름 감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자유로운 '여성적' 콘텐트에도 관심을 보이기도 함. 당신 취향은 출판 업계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소비계층입니다. 책을 많이 소비하는 취향 그룹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책을 비평하는 평론가들은 대부분 이 취향에 속하기 때문이죠. 트위터에서 한동안 화제가 .. 더보기
잘 산다는 게 무엇이냐. 김규항.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 사람에게 주목하게 된 건 를 읽은 후부터다. "몸이 늙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정신이 늙는 건 선택할 수 있다"는 문장이 또렷히 남았다. 물론 그렇다고 '열혈독자'가 된 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열혈독자가 될만큼, 무언가에 애정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애정을 남겨 두고 그 나머지 분 가운데 '지적 애정'을 줄 수 있는 범위에 그가 포함된 것이다. 여튼 그 뒤로 에 실리는 그의 글을 유심히 보게 됐고, 란 잡지를 창간했단 소식을 들었을 땐 많이 궁금했다. 그 관심과 호기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얼마 전 그의 인터뷰집 를 읽은 이유도 그 애정덕분이었다. 재밌었고, 한결 가벼운 김규항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즐거웠다. 소설이든, 사회과.. 더보기
뻔한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하지만 그럼에도 들을 수 있는 얘기가 뻔하다는 것도 잘 안다. 시간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잠을 줄여라, 목표를 생각해라.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버는 삶은 고달프다 등등 ..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를 묻는 게 아니란 거다.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뿐, 그래서 이야기를 풀고 풀어내는 것일뿐 아무리 상황이 꼬이더라도 결정은 내 몫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안다. '너무도 잘 안다'는 게 내 착각이고, 그래서 나를 편협하고 완고한사람으로, 경직된 얼굴로 만드는 걸지 모르겠지만, 덜 지성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도피보다는 정면 대결을 택하고 있는데, 그만큼 대결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새벽별을 보며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맞이하고 하루 종일 지옥훈련을 해도 모자를 판인데 자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