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지음/동아시아 그 날, 두 남자가 70m짜리 굴뚝에 올랐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김정욱과 이창근이었다. 2009년 사측이 강행한 정리해고가 무효라던 고등법원 판결이 뒤집힌 날, 이창근은 노조 기자회견 사회를 봤다. 6년 가까이 언론을 상대하고 다양한 기자회견, 집회를 진행해온 그였던 만큼 시작은 괜찮았다. 하지만 희망이 산산이 짓밟히는 광경을 목격한 그는 끝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별의 별 것 다 싸워봤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던 그가 마지막으로 굴뚝에 오른 날, 또 한 명의 해고자가 숨졌다. 일상을 누리는 일조차 한없이 죄스럽게 느껴지던 그 날, 나는 <김대식의 빅퀘스천>을 펼쳤다.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란 질문이 자꾸 눈에 박혔다. 그런데 이 질문의 답은 단순히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라는 챕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저자 김대식 교수가 던지는 31가지 질문들로 이뤄진 퍼즐 조각을 맞춰야만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삶의 의미, 그리움, 아름다움, 진실, 외로움, 인간을 묻는다. 또 과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신화와 철학, 역사, 예술을 오가며 답한다.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공간을 꿈꾸며. 그래서 “인간은 모험과 탐험을 통해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본문 28쪽)”하고, “현실은 나에게 저항”하는데도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바꾸려고 한다(86쪽). 또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물으며 자꾸 “선택”하려고 한다. 그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103-104쪽). 우리가 계속 흔들리며 살아가는 이유는 또 다른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김대식 교수는 그것을 역사학자 하라리 교수가 말한 호모 사피엔스와 멸종한 네안데르탈인들의 차이, ‘픽션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인용해 설명한다. 그 픽션은 ‘지금, 여기’가 아니지만, ‘지금, 여기’가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매머드 그림을 오늘 동굴에 그리면, 내일 잡힐 테고, 사냥에서 아무도 죽지 않고 돌아올 것이며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더 좋은 어디선가에서 계속 살 수 있을 것(201쪽)이라는 이야기로 삶을 만들어가는 힘, 정의와 평등은 가능하고. 우리만이 선택된 민족이며 삶에는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현실로 빚어내는 힘들이 바로 그 능력이었다. 인간이 외로움을 느끼기에 자꾸 현실에 저항하고, 선택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외로운 사람은 몸이 변한다. 심장질환의 원인인 단백질 인터루킨-6(IL-6) 수치가 높아지고 면역력은 떨어지며 혈압이 오른다. 뇌졸중 위험도 커진다.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동상 걸린 손각이 떨어져나가듯, ‘우리’라는 집단 안의 교감과 소통에서 단절된 홀로 남은 인간은 어쩌면 조용히 사라져버리도록 프로그램돼 있는지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집단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벌 중 하나는 더 이상 ‘우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인다(230쪽). 결국 인간은 현실을,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고 버텨온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이 마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욕망은 마침내 ‘인간은 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낳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넘나들고 있다. “깡통” 같기만 했던 존재가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는 날을 꿈꾸며. 만약 그 날이 온다면 기계는 물을 것이다. “우리가 지구의 모든 것을 도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분리한 것처럼” ‘인간은 왜 필요하냐’고. 김대식 교수는 “불행하게도, ‘논리’는 인간 편이 아니다(308쪽)”라며 “인공지능이야말로 인류에게 주어진 계몽의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312쪽)”라고 말한다. 우리도 알고 있다.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던 모든 이념과 기술들은 이제 사람들을 처절할 정도로 가르고, 나눈다. 정의를 기대하고, 외로움을 극복하려 아름다움을 꿈꾸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흔들리고, 쓰려져야 비로소 돌아본 것이 지금까지의 우리였다. 저기 굴뚝 위에 사람이 있는데도, 차가운 바다 속에 사람이 있는데도,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고, 망각했던 우리였다. 그러니 ‘우리 시대의 31가지 위대한 질문’을 하나하나 곱씹어 봐도 퍼즐은 좀처럼 완성되지 않는다. 거대하고 복잡한 질문들을 보기 좋게 담아놨지만, 우리가 발 담그고 있는 현실과 다소 떨어진 책이 주는 아쉬움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정의를 기대한다면, ‘지금, 여기’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힘이 있다면, 당신과 나 그리고 저 굴뚝 위에 있는 두 남자를 ‘우리’라 여긴다면, 책장을 덮은 당신은 지금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정의, 우리가 바라는 이야기, 우리가 꿈꾸는 ‘우리’를 만들어온 힘은 늘 그렇듯 수많은 시도와 실패들이 기원이었으니까. ▲ 두 남자는 1월 2일 기준으로 21일째 고공농성 중이다. 사진은 지난 12월 15일 모습. ⓒ 유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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