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드레스 - 알비 삭스 지음, 김신 옮김/일월서각 |
‘한 사람의 인생이 휘말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요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을 보며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검찰과 법원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가장 핫(HOT)한 사건이기에 피고인 유우성씨를 이래저래 접할 일이 많다. 하루아침에 간첩혐의로 체포·구속당하고, 둘도 없는 여동생마저 시달려서인지 그의 얼굴은 다소 어두워 보인다. 표정도 거의 없고 목소리에선 그늘이 느껴졌다. 언젠가 그는 자신을 “작은 꿈을 찾아온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기엔 겪고 있는 일들이 너무나 크다. 그의 모든 것은 순식간에 뒤흔들려버렸다. 테러 피해자 역시 비슷하다. 무분별한 폭력에 피해 입은 사람의 어제와 오늘, 내일은 분명 다르다. 그래서였을까. <블루드레스>를 읽는 내내 유우성씨를 떠올렸다. 테러로 한쪽 팔과 눈의 시력을 잃은 알비 삭스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재판관의 모습과 어딘가 닮아보였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두 사람의 확연한 차이도 있다. 알비 삭스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의식을 찾자마자 그는 농담 하나를 떠올렸다. 기분이 좋아지고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심장과 갈비뼈가 온전하고, 고환이 무사했다. 오른쪽 팔이 잘려나갔을 뿐이었다. 그는 웃었다. 특유의 유쾌함은 법정에서도 여전했다. 법의 또 다른 인간성을 지키려는 일이기도 했다. 상표 패러디를 놓고 고민했던 재판에서 알비 삭스는 ‘법은 유머감각을 갖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스스로 내놓은 답은 ‘그렇다’였다. 그는 “유머는 민주주의의 훌륭한 해결책이며 수만 가지의 불만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촉진한다”고 말했다. 결국 웃음이 “우리 사회의 헌법적 건강성을 담보하는 묘약”이라고 했다. 마냥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알비 삭스의 오른쪽 팔은 남아공 역사의 일부분이었다. ‘편 가르기’는 오랫동안 검은 대륙을 아프게 했다. 정의, 평등, 관용이란 단어는 사전 속에만 존재했다. 알비 삭스는 이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자유를 위해 싸웠고, 많은 동지와 친구들을 잃었다. 테러로 잘려나간 팔은 몸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알비 삭스는 헌법재판관 취임식날 헌법을 두려움이나 편견 없이 수호하겠다고 선서하며 오른팔을 들었다. 그건 “불행은 개인의 몫이 아닌 국가가 해결해야 할 부정의”며 “우리 세대는 공존을 시작했고, 다음 세대는 훨씬 덜 분열된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란 선언이었다. 책의 제목은 남아공 예술가 주디스 메이슨이 자유를 위한 투쟁 중에 사망한 필라 은드완드웨와 헤럴드 세폴라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1995년 2월 제작한 '노래를 부른 남자와 침묵을 지키는 여자'의 연작에서 따왔다. 이 작품은 책 표지에도 쓰였다. 이 연작들은 남아공 헌법재판소에 걸려 있다. ⓒ Judith Mason 이 모든 일들은 ‘인간’이라는 두 글자로 통했다. 알비 삭스는 판결을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며 “독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 아니라 권리와 권리 사이에 얽힌 주장들을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에 기초한 열린 민주사회에서 허용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평가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목표는 균형이었다. 단순히 논리의 바늘을 저울 중앙에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역사·사회·창의적 현실의 맥락에서 찾는 일”말이다. ˝악함과 잔혹함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있지도 않은 외부의 끔찍한 적과 싸우기 위해 국가가 도덕적 규범을 어기고 엄청난 악행을 자행했다는 주장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누군가의 헌법적 권리는 보호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법원이 그 누군가의 헌법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미룰 수는 없다.˝ 적(敵)은 개인이 아닌 부당한 시스템이었다. 알비 삭스와 동료들이 그토록 지키려했던, 헌법에 한 장 한 장 새긴 원칙이었다. 힘겹게 그 원칙을 고수한 덕분에 그는 자신의 테러에 연루됐던 퇴역군인 헨리와 악수할 수 있었다. 진실을 말했던 그에게 알비 삭스가 오른쪽 눈을 맞추고, 왼손을 내민 날 이후, 헨리는 한동안 많이 울었다고 한다. 다시 유우성씨를 떠올린다. 며칠 전, 그의 항소심 결심공판이 열렸다. 유씨의 변호인들은 말했다. ‘증거조작’이라는 사법체계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고, 사법민주화가 무너질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그렇다면 이 사법체계에서 법을 다루는 사람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법원이 최후의 보루라고. 1년 넘는 시간 동안 법정 안팎에서 수많은 사실들이, 하나의 진실을 놓고 끝없이 싸웠다. 그 과정은 결국 국가와 법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었다. 알비 삭스는 “만약 우리 판사란 사람들이 국가가 실험대에 올랐을 때 판결을 통해 나라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판사로서의 소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 소명은 일종의 얼굴로 드러나는 것 아닐까. 사자가 아닌 인간의 얼굴. 한때 법의 얼굴은 전자에 가까웠다. 오랜 싸움과 많은 희생 끝에야 비로소 법은 후자의 얼굴을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불완전한 상태다. 4월 25일, 법원은 우리에게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참고) 주디스 메이슨 연작그림 http://www.judithmason.com/assemblage/5.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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