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재미없는 책이네.’
몇 년 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궤변’으로 느껴지는 말들로 가득한 책을 ‘그래도 다 읽어야 해’란 생각에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꾸역꾸역 다 읽긴 했다. 남는 내용은 없었다. 2010년대 한국 사람의 눈으로 1930년대 독일 사람들을 이해하긴 어려웠고.
<그가 돌아왔다>의 인상도 비슷했다. 1945년 죽은 줄 알았던 히틀러가 2011년에 나타나 유튜브 스타가 된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해 기대를 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1인칭 시점으로 알게 된 히틀러의 머릿속, 그가 변해버린 세상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은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이 책은 돌아온 히틀러가 사람들을 어떻게 선동시키고 있느냐를 매우 불친절하게 설명했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나는 계속 ‘몇 페이지나 남았지’ 생각했다.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바가 이 ‘불친절함’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히틀러가 얼마나 매력적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에게 열광했고 추종했다.
히틀러를 비판하는 <빌트지>와 그를 의심하는 ‘네오나치’들이 있긴 했으나 소용없었다. 한때 리모컨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정도로 TV라는 물건을 통 이해하지 못하던 히틀러는 그 TV속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을 사로잡는다. 자신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크뢰마이어의 할머니를 설득하고, 호텔 경비와 병원 직원들까지 감화시킨다. 그러자 정당들은 녹색당, 자민당, 사민당 할 것 없이 그를 영입하러 나선다. 결국 끝에 웃은 자 역시 히틀러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여론이 대개 그렇다. 우리는 별 대단한 이유가 없어도 환호하거나 분노한다. 여론이 달아오르는 일은 쉽다. 문제는 그 여론의 방향이다. 99℃까지 끓은 물이 1도 더 높아지는 순간, 이때가 중요하다. 이 순간의 방향이 ‘진보’를 가져온 것이 87년 6월 항쟁이라면, ‘인류 전체의 비극’을 낳은 때가 바로 히틀러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다>에서 묘사했듯, 21세기에 등장한 히틀러가 별 무리 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면….
이것은 지나친 망상일까?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세상은 너무나 흉흉하고, 사람들은 너무나 평범하다. 이 책과 함께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를 읽었다. 밀턴 마이어가 독일에 거주하며 나치에 가담했던 10명을 인터뷰한 내용들을 보면, 2차 대전의 잔혹극은 단지 히틀러라는 악마 혼자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커진다. 한 목수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발전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독재정치를 하고 있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어떤 사람한테 돈이나 기회가 없게 되면, '체제'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게 되는 거예요. 그때에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모두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신 총통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미국인께 감사드립니다.' 만약 공산주의가 대세라면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우리는 스탈린께 감사드립니다.' 사람이란 다 그런 거죠. 제가 자진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히틀러는 1930~40년대 독일인들이 무엇에 갈증을 느꼈는가를 잘 포착했을 뿐이었다. 다수의 동조와 침묵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졌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또 ‘그’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올 수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생각하면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불길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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