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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채동욱 혼외 아들' 혈액형이 유력한 증거?

‘수헬리베붕탄질산플네, 나마알규인황염아칼칼’


주입식 교육은 힘이 세다. 지금도 주기율표 앞부분 20개는 ‘수’만 떠올리면 줄줄이 내뱉을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암기한 덕분이다. 혈액형도 마찬가지였다. 크게 AO, AA, BO, BB, AB, OO로 나뉘는 유전자형이 담긴 표를 최대한 네모반듯하게 그리려 애쓰며 외웠다. 모의고사 등을 볼 때면 어김없이 등장했으니까. 노력은 빛을 발했다. 혈액형 문제는 그럭저럭 맞출 수 있었고, 지금도 나는 혈액형을 생각하면 먼저 그 네모난 표를 떠올린다.


청와대 관계자는 달랐다. 앞선 교육과정에서 같은 내용을 더 엄격하게 배웠을 텐데, 주입식 교육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겨레>는 14일 채동욱 검찰총장의 갑작스런 사퇴 배경에는 ‘청와대의 개입’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혼외아들’ 의혹과 관련해 유력한 증거인 ‘혈액형’이 나왔다며 검찰을 압박했다는 얘기였다.


지난 13일 오후 전격 사의를 표명한 채동욱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를 나서고 있다. ⓒ 남소연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팀 관계자는 지난 6일 ‘채 총장의 혼외 아들이 있다’는 <조선일보> 보도가 나간 직후인 지난 주말께 대검찰청 쪽에 전화를 했다. 이 관계자는 ‘채 총장의 혈액형이 A형, 혼외 아들의 어머니라는 임아무개(54)씨가 B형, 혼외 아들이 AB형인 사실을 확인했고, (혈액형은) 유력한 증거니까 채 총장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A형, 어머니가 B형이라면 그 자녀는 AB형일 수 있다. 하지만 이 혈액형이 ‘채모군이 채동욱 총장의 혼외 아들’이란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가 못 된다. A형 아버지와 B형 어머니를 둔 아이는 얼마든지 A형일 수 있다. B형 또는 O형도 가능하다. 만약 부모의 유전자형이 각각 ‘AA, BB’라면 두 사람 사이에선 AB형만 태어날 테지만, ‘AO, BO’라면 자녀가 지닐 수 있는 혈액형은 A, B, AB, O형 네 가지 중 하나다. 채동욱 총장과 임아무개씨, 채아무개군의 혈액형이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의심을 키울 수는 있어도,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A형이 전 국민의 34%나 된다. 유력한 증거라는 게 말이 안 된다(<한겨레>, 사정당국 관계자)”는 반응을 보일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ABO식 혈액형을 발견, 193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과학자 카를 란트슈나이더. 저승에서 한국을 보며 어이없어 하고 있지 마시길.... ⓒ corbisimages


오스트리아 과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1901년 ABO식 혈액형 구분법을 세상에 알려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100여년 뒤 한국의 청와대는 그 방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검찰총장을 밀어내는 근거로 삼았다. 수집 절차 역시 의심스러운 임아무개씨와 채아무개군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상한 과학’을 내세우며 압력을 행사했다. 이걸 주입식 교육의 실패로 봐야 할지, 문이과 분리 교육의 폐해로 봐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