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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두 개의 글, 하나의 길

오늘 아침 출근길은 마치 알래스카 탐험에 나선 것처럼 느껴졌다. 전날 펑펑 내린 눈은 수북이 쌓였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을 때면, 몸은 미끄러운 빙판길 위에서 휘청거렸다. 문득 '폐지 줍는 어르신들은 오늘 절대 집밖에 나오시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박눈이 반가웠지만 아이마냥 좋아하긴 어려웠다. 조금씩 채워가는 나이탓만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 것만 알고, 내 할 일만 잘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에는 몰랐다. 누군가는 거리에서 식은 밥 덩이에 고추장을 쓱쓱 비벼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밤낮 없이 일해도 한 달을 살아내기 빠듯한 어떤 이가 있다는 것을, 종일 손수레를 드르륵 끌고다니며 폐지를 줍고 받은 몇 천 원 혹은 몇 만 원을 꼬깃꼬깃하게 품고 다니는 어르신의 모습을 깨달은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번 겨울엔 또 하나의 아픈 광경이 추가됐다. 허공에 매달린 사람들 때문이다. 울산에 2명, 아산에 1명, 그리고 평택에는 다섯 사람이나 있다. 열흘 동안 동두천시청 옥상 무전탑에 올라갔던 2명은 건강이 나빠져 지난달 말 내려왔다. 산 사람 여덟이 칼바람을 맞아가며, 손도르레로 올려준 밥을 먹고 깡통 등을 화장실 삼아 하늘에 머물고 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압은 커지고 온도는 낮아진다. 펭귄처럼 옷을 껴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껴도 공기가 너무 찬 날들이다. 그들도 옷을 껴입고 핫팩을 몸에 붙였다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얼마나 서늘할까. 마음이 무거웠다.


11월 22일 한겨레에 실린 고공농성 현황. 동두천시청 옥상 무전탑에 올랐던 두 사람은 농성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건강 악화로 내려왔다. ⓒ 한겨레


무거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빙판길을 걸어가던 아침, 두 개의 글을 봤다. 심보선 시인과 영지 언니가 쓴 것이었다. 눈(雪)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던 걸까. 심보선 시인과 그의 친구에게도 올 겨울 눈은 조금 달랐나보다. 사람을 먹먹하게 만들었나보다.


얼마 전 첫눈이 왔다. 함박눈이었다. 친구가 전화를 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야아, 첫눈이다! 너도 보고 있니?"라고 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철탑에 있는 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견디고 있는 거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폭설이 내리고 있다. 이번 겨울에 눈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눈은 지상에 내리는 축복이 아니다. 저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이제 눈은 한 송이 한 송이가 흉기인 저주처럼 느껴진다.


…(중략)… 나는 어제 출근길에 길가에 도열한 송전탑들을 보았다. 몇 년을 왕복하던 출근길이었는데 송전탑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송전탑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환영을 보았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눈은 간절했고 나는 그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나 또한 나의 세상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첫눈은 예전의 첫눈이 아니었고 송전탑은 예전의 송전탑이 아니었고 높은 허공은 예전의 높은 허공이 아니었다.


- 심보선, 눈(雪)의 의미


11월 20일 쌍용차지부 노조원 세 사람이 평택 쌍용차 공장 정문 앞 도로 맞은편 고압 송전탑에 올랐다. ⓒ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한겨레>에선 반가운 사람의 가슴 저릿한 문장을 만났다. '왜냐면'에 실린 영지 언니의 글이다. "가난은 벼랑 끝이 아니다"라는 말 맞다. "그러나 빈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빈곤은 '관계의 단절'이다"라는 말은 더 맞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지만, 빈곤은 '가난한 행복'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은 조금 나은 내일을 꿈꾸지만, 빈곤한 사람은 때때로 '오늘'조차 사치스럽게 느낀다. '살아내면' 다행이라고 여길 뿐이다.


가난은 벼랑 끝이 아니다. 가난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빈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빈곤은 ‘관계의 단절’이다. 안창영 감독의 영화 <빈곤의 얼굴들 2>는 철거민, 장애인, 해고노동자 등 6명의 사람을 통해 ‘빈곤에 감염돼 가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중략)… 복잡하게 엉킨 빈곤의 실타래에서 무엇을 먼저 풀어야 하는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희망버스’를 떠올려보면 의외로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정리해고 철회’라는 변화를 이끌어냈다. 오늘도 여전히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농성촌에서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디며 “함께 살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내 이웃이다.


- 서영지, 빈곤은 내 바로 옆에 있다


'알고 있다, 알면 다행이다' 라는 말로 넘어가기엔 철탑은 너무 높고 빈곤은 너무 가깝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다시  눈이 내렸다. 설국의 겨울은 한층 짙어졌다. 두 개의 글에서 말하는 길은 '연대' 하나인데, 우리는 언제쯤 그 길 위에 제대로 서게 될까. 그 끝에 함께 웃는 날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