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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무능을 기록하다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몸도 마음도 쉽지않지만... 기록하는 일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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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150



아이들은 멋쩍은 듯 웃었다. 


“잘 모르겠는데….” 


몇몇은 앉은 자리가 불편한지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곤 했다. 길을 가다보면 ‘고딩이구나’하고 지나쳐갈 법한 모습들이었다. 7월 28일과 29일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401호 법정 증인석에 앉은 단원고 학생 22명은 그랬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에 있었다는 점만 뺀다면.


그 평범하고 천진난만한 말투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무능’을 증언했다. 생존학생들의 탈출경로는 대부분 혼자 힘으로 또는 친구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빠져나왔다는 식이었다. 물론 선한 어른들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믿고 기다렸던 선원들은 오지 않았다. 해경도 다르지 않았다. ‘탈출과정에서 선원이나 해경을 보거나 그들에게 도움 받은 적 있냐’는 검찰의 질문에 22명은 똑같이 답했다. “아니요.” 


어른들의 무능으로 아이들은 한순간에 친구를 잃었고, 평생 낫지 않을 상처를 입었다. 법정에 선 그들은 ‘친구들을 놔두고 혼자서만 돌아왔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손목에 걸고 있는 ‘remember 0416’ 노란 팔찌가 흔들렸다. 어깨가 들썩였고, 얼굴과 두 귀가 붉어졌다. 증언을 메모해가던 방청석의 한 중년 남성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법정에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나는 몇 번 입술을 깨물었다. 노트북 자판 위를 오가던 손가락이 멈칫멈칫하곤 했다. 하지만 기록해야 했다. 그들이 목격한 우리의 무능을 고스란히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와 동료 기자의 도움을 빌어 생존학생 22명의 법정증언을 최대한 가감 없이 전달하려 했던 이유다. 지난 5월 세월호 도면을 들고 제주도에 내려가 김동수씨 등 화물기사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모은 까닭도 같았다.


단원고 학생이든 일반인 승객이든 생존자들의 증언을 직접 듣는 것은 예상보다 괴로웠다. 그들의 말을 토대로 탈출경로와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거듭 내용을 되새겨보는 일은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줬다.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최근 선원들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30명의 ‘그날’을 정리할 때에는 내내 머리가 무겁고 지끈거렸다. 계속 세월호에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진통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다른 재판들을 방청할 때도 비슷했다. 곳곳에는 ‘무능’의 흔적이 가득했다. 피고인석에 앉은 사람이 선원이든, 청해진해운 쪽이든, 해운조합 관계자이든, 증거가 사진이든 영상이든, 피의자신문 조서든 마찬가지였다.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모두들 그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만 내놨다. 그 광경을 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선 ‘착잡하다’는 표현으로 부족한 감정에 휩싸였다. 세월호를 가라앉힌 주범은 오랫동안 쌓이고 또 쌓여온 무능들이었다. 우리는 정말이지, 무능했다.


좌절하고 한탄할 수만은 없다. 방향 잃은 분노와 슬픔은 망각과 냉소를 부추길 뿐이다. 결국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구호에서 멈춰버리리라. 생때같은 아이들 수백 명을 바다에 던지고서도 아무런 성찰 없이, 사람을 그저 값으로만 매겨버리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 또 다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라며 울먹이는 아이들을 목격할 때, 우리의 무능과 실패를 맞닥뜨릴 때 이 사회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고개를 젓고 있다. 


그래서 기록한다. 거의 매주 세월호를 탈 때마다 목격하는 우리의 무능과 실패들을 최대한으로, 꼼꼼하게, 있는 그대로 옮겨 적으려 한다. 이건 감시기능을 다 하지 못한 나, 그리고 한국 언론의 무능을 기록하는 일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