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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몇 가지/조금만 더

기자는 전달자인가, 아니면 전문가인가

http://slownews.kr/29888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저럴 것 있을까? 차라리 내가 공부 좀 해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내가 전문가 노릇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해보니, 할 만했다. 그쪽에 관심 두는 기자들이 없었던 탓에 노력에 비해선 꽤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망중립성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올 초 미국 항소법원이 FCC의 2010년 오픈인터넷규칙에 대해 사실상의 사망선고를 했다. 그때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쩌면 또 다른 블루오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얄팍한 생각. 그래서 날 잡아서 마음먹고 항소법원 판결문을 읽어봤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특허 소송 판결문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그런 다음엔 전문가 멘트 생략하고 아예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한번 해 봤다. 전통적인 기사 요건이란 잣대로 접근할 경우엔 문제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적어도 한 가지 확신을 하고 있었다. 형식적 객관주의의 틀은 벗었지만, 적어도 내용 면에선 ‘객관주의 틀’을 고수한 기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


망중립성 기사를 쓸 땐 법원 판결문과 함께 관련 서적들을 몇 권 독파했다. 읽다 보니 망중립성의 근본 철학인 ‘커먼 캐리어’(common carrier)란 게 꽤 깊은 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뿌리를 잡고 보니, 현재 공방을 벌이는 논쟁들이 좀 더 쉽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래서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거구나”란 생각을 했다. 그때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후배 기자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he said / she said 저널리즘’ 극복해야


자, 글을 맺자. 20세기 저널리즘에선 기자들은 굳이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땐 전문가의 얘기를 잘 정리해서 전달해주는 것만으로도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젠 시대가 바뀌었다. 이젠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앵무새처럼 옮기는 것만으론 ‘기자란 직업’의 존재 가치를 부각하기 힘든 시대가 됐다. 이젠 기자들에겐 팩트 수집보다는 분석과 논평이 훨씬 더 중요한 덕목일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당연한 얘기지만 ‘특종 무의미론’은 절대 아니다. 특종. 당연히 기자의 생명이다. 하지만 몇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특종으로 기자의 사명을 다 했다고 하는 건, 너무 한가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예전 우리가 대학 다닐 땐 서술형 시험을 볼 때 외워서 써야 하는 게 많았다. 그땐 지식을 외우는 것도 경쟁력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떨까? 이젠 외우는 건 더는 경쟁력이 될 수 없다. 스마트폰 뒤지면 금방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건 무수히 많은 정보 속에서 맥락을 찾아내고, 그 정보의 의미를 분석해내는 게 더 중요한 경쟁력인 시대가 됐다.


이런 시대 변화는 저널리즘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러니 이제 기자들도 전문가의 치마폭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전문가를 만나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전문가들 역시 경쟁자란 생각을 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