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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 <나인>

<다모> 이후 이토록 마음이 동하는 드라마는 오랜만이다. 여주인공의 코맹맹이 소리가 가끔 몰입도를 떨어뜨리긴 하지만, 허투루 찍은 한 컷을 찾기 힘든 <나인> 이야기다. 여기저기서 하도 이야기를 많이 하기에 지난주에 1회를 찾아봤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인줄 모른 채 ㅎㅎ 결국 며칠만에 16회 정주행을 마치고, 이번주 월요일 17회부터는 본방 사수 중이다.



원인 모를 화재로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그 일로 실성한다. 역시 반쯤 넋이 나간 형은 "우리 가족 모두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다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눈사태로 숨진다. 기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주인공 박선우의 가족사다. 


그런데 형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네팔에서 그는 신기한 향 9개를 손에 넣는다. 정확히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30분 동안 머물 수 있게 하는 타임머신. 형을 되살리고,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어 과거로 되돌아갔던 그는 현재를 바꾼 대신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박선우는 하나 남은 향을 쓴다. "향은 선악과다, 절대 쓰지 말아라"는 친구 영훈의 만류에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것"이라며 과거로 떠난다. 하지만 마지막 시간여행에서 과거와 현재 일부를 바로잡고난 그는 '20년 전 오늘'에 갇혀버린다. 이렇게 7일 열여덟번째 이야기가 끝났다.



허지웅이 말했듯 <나인>은 영화 <나비효과>와 드라마 <24>를 연상시킨다. <백투더퓨처>처럼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맘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박선우는 제한된 시간 안에만 시간여행이, 그것도 딱 9번 가능하다. 또 과거의 한 가닥만 바꿔도 현재의 수많은 일들이 변해버린다. 이 여러 제약들덕분에 '시간여행'이란 식상한 소재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 약 50분 동안 중간광고 + 편집으로 흐름이 끊길 때말고는 좀처럼 집중력을 잃지 않고 시청하게 만드는 힘 중 하나다.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캐릭터를 살리며 극의 중심을 잡아가며 '이 사람이 연기를 이렇게 잘했나?'란 생각을 하게 하는 배우 이진욱도 그렇다(도넛 잘 먹는 달달한 청년만이 아니었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은 '질문하는 힘'이다. 행복을 위해 20년 전으로 떠났던 박선우는 현재에 돌아와 절망한다. 형은 살아났지만, 연인은 가족이 되어버렸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알았지만, 범인은 형이었다. 흔들리지 않으며 살게 했던 '복수심'의 뿌리는 악인 최진철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진실, 바뀌지 않았으면 나았을 현실은 '시간여행은 축복인가, 저주인가'란 질문을 계속 던진다. 인간의 의지는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또 그것이 정녕 맞는 방향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남은 분량은 2회다. 볼 때마다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심지어 박선우의 죽음을 암시하며 18회를 마무리지은, 밀당의 고수 <나인>. 박선우와 주민영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일까, 따라가는 것일까.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이 드라마는 식상하게 내놓지 않으리란 막연한 믿음을 품은 채 다음주 월요일을 기다린다. 너무 멀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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