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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밑줄을 긋다

그러므로 우리는 :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은 영원하다.

- 나는 밖으로 나가 부드러운 석양을 받으며 공원이 있는 동쪽으로 산책이나 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거칠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내 목덜미를 잡아채는 바람에 밧줄로 묶이기라도 한 듯   꼼짝 없이 의자에 붙들려 앉아 있었다. 지금도 도시의 하늘을 장식하는 이 방의 노란 창문들은  땅거미가 내려앉는 거리를 지나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비밀을 나누어주고 있으리라.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올려다보고 궁금해하는 자였다. 나는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었다. 놀랍도록 다양한 인간사에 매혹당하는 한편으로 진절머리를 내면서.

- 그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그것은 변치 않을 확신이 담긴, 일생에 네다섯 번쯤밖에 마주치지 못할 특별한 성질의 것이었다. 잠깐 전 우주를 직면(혹은 직면한 듯)한 뒤,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편애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노라는, 그런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바로 그만큼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하는 호의적 인상의 최대치를 분명히 전달받았노라 확신시켜주는 미소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 미소는 홀연 사라져버렸다.

- "데이지의 목소리에는 신중한 구석이 없어." 내가 말했다. "목소리에 가득한 건..." 나는 망설였다.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야." 개츠비가 불쑥 말했다. 바로 그거였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정말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충만했다. 돈, 그 안에서 오르고 내리는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짤랑거리다가 때론 심벌즈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려대기도 하고, 하얀 궁전의 공주처럼 저 높은 곳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금으로 만든 소녀상처럼...

- 우리가 톰과 함께 쿠패를 타고 롱아일랜드로 출발한 건 일곱시였다. 톰은 신이 나서 쉴새없이 웃으며 떠들어댔지만 그의 목소리는 보도의 낯선 소음이나 고가도로 위의 법석만큼이나 나나 조던에게는 멀게 느껴졌다. 인간의 공감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그들의 비극적인 다툼이 맨해튼의 불빛 너머로 사라지는 것에 만족했다.

- 서른 살, 외로운 십 년을 예고하는 나이, 알고 지내는 독신남이 줄어들고 열정을 담은 서류가방이 얇아지고 머리숱도 줄어드는. 그러나 내 곁에는 조던이 있었다. 그녀는 데이지와는 달리 너무 현명해서 까맣게 잊어버린 꿈들을 해를 넘겨서까지 간직할 사람은 아니었다. 어두운 다리를 지날 때에 그녀가 내 윗옷 어깨 위로 나른하게 머리를 기대왔다. 서른이 되었다는 무사무시한 타격은 그녀의 손길 아래에서 위안을 얻었다. 우리는 서늘한 황혼녘의 도로를 그대로 질주하여 죽음으로 향해 나아갔다.

- 데이지는 어렸고, 그녀의 잘 꾸며진 세계는 난초향과 즐겁고 유쾌한 속물근성의 냄새로 가득했고, 오케스트라는 슬픔과 인생애 대한 암시를 새로운 선율에 얼버무려 담은 유행가들을 연주해댔다. 색소폰이 구슬프게 <빌 스트리드 블루스>를 불어대는 동안, 수백 켤레의 금빛과 은빛 구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엇갈렸다.

- 새로운 세상,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이런 세상에서 가련한 혼령들은 마치 숨을 쉬듯 꿈을 들이마시면서, 우연을 가장하여 주위를 맴도는 법이다.

- 누구라도 데려오고 싶었다. 그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사람을 찾아볼개. 개츠비, 걱정 마. 날 믿어. 누구든 데려올게..."

- 나는 낙엽 태우는 파란 연기가 공중으로 올라가고, 바람이 빨랫줄의 세탁물을 뻣뻣하게 얼릴 때 즈음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황홀한 미래를. 이제 그것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뭐가 문제겠는가.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

-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