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도짜리 참이슬을 입에 털어 넣었을 때 물처럼 술술 넘어가는 날이 있는가 하면 '아 쓰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날이 있다. 오늘은 소주가 썼다.
2개월 반짜리 학원 강사 일을 그만 뒀다. 내심 타이밍을 찾고 있기도 했지만, 가르칠 아이들이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덕분이다.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이제야 애들하고 좀 친해지고, 익숙해지는 것 같았는데.. 역시 난 소심하지만 정 많은, 어쩔 수 없는 박소희다. 그래서였나보다. '공부 못하는 애들' 탓을 하는 원장의 변명이 귀에 거슬렸다. 참 전형적인 40대 남성이다. 욕망은 있지만, 능력은 부족하고 여건도 충분치 않은, 그래서 '탓'할 상대를 찾거나 자기 변명과 합리화에 급급한 그런 캐릭터말이다.
불과 10분 전에 내리면서 리더기에 교통카드를 대지 않아서 추가요금이 나올 줄 알았는데, 같은 번호 버스를 타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8번 마을버스를 탔다. 나는 소심하다. 새마을식당을 갈까, 짚동가리 쌩주를 먹을까 고민했다. 평소와 다르게 버스는 새마을식당 맞은편에 섰다. '오늘은 7분 김치찌개를 먹어야 하는 날이구나' 그 전에 잠깐 코앞에 있는 야구게임장에 들렀다. 1000원을 넣자 열두개의 공들이 순서대로 날라왔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공을 때리는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공에 맞을까봐 두려웠는데, 고기를 굽다가 화상 입을까봐 두려워하진 않는다. 사람은 참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다.
왜 오늘은 소주가 썼을까.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목살소금구이와 얼큰한 김치찌개에 슥슥 비빈 밥을 앞에 두고 마신 소주는 달지 않았다. 오늘 <한겨레> 1면엔 공무원 시험과 행정 인턴에 목 매는 청년실업자들 이야기가 나왔다. "인문계열 출신은 아예 지원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여성으로 입사 지원이 가능한 나이를 넘긴 것 같아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는 김모씨와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입사하지 못하면 결혼도 어렵고, 수도권에서 기반을 잡고 살기 힘들다"는 박모씨의 이야기가 이제는 남 말 같지 않다. 속이 쓰리다.
그래서 소주가 썼을까.
지난번에 눈여겨 봤던 글에 대한 반론이 지면에 실렸다. "20대 담론은 정직하게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라며 "결국 문제는 말이 아닌 행동"이라고 끝맺는 글이다. 몸을 바꿔야 한다, 일단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제는 장황한 반성문도 남겼다. 허나 쉽지 않다. 나는 700원의 환승 추가 요금이 부담스럽고, 계획보다 불어난 한달 지출에 짜증이 나고, 전기장판의 따뜻한 유혹에 벗어나질 못해 늦잠을 잔 자신이 한심하고, 앞으로 어떻게 용돈을 충당할까 고민한다. 말이 아닌 행동은 쉽지 않다. "문제는 말이 아닌 행동"이란 한 마디에 속이 쓰리다.
두달 반 동안 가르쳤던 아이들은 착했다, 단지 공부할 뜻이 부족했을 뿐이다. 늦은 오전, 러닝머신을 뛰며 본 '화성인 바이러스'에 전교 356등이었다가 명문대에 진학한 '공부의 신'이 나왔다. 시간이 아까워 밥과 국, 김치에 물을 섞어 믹서기로 갈아마시며 학교를 다녔댄다. 팔뚝에 유성펜으로 암기할 내용들을 적고, 매일 8시간을 꼬박 필기해 모나미 볼펜 하나를 다 써가며, 수능 1등급으로 당당히 명문대에 입학했댄다. 후배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노력은 장하지만, 너의 승리는 끝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희망과 자신에 찬 그를 보며 선망해 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갑갑하다. "이걸 왜 배워요?"라는 물음에 그닥 할 말이 없었다. 학원비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사교육을 택하는, 강남애들과 우리는 결국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을 보며 또 속이 쓰렸다.
그래서 소주가 썼을까.
시시콜콜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