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량이 예상을 초과해 팟캐스트 서비스를 일시중지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YTN>, <MBC> 출신 해직 언론인들이 의기투합해 시작한 인터넷 방송 <뉴스타파>가 첫 회에 `대박홈런`을 쳤다.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린 지 3일 만에 30만건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다. 팟캐스트 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버는 예상을 뛰어넘은 접속자 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기존 뉴스와 차원이 다르다˝, ˝정말 궁금했지만 다루지 않았던 것을 다뤄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줬다˝는 시민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여론조작>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접한 이 소식에 마음이 복잡했다. 사람들은 알고 있다. ‘선전모델(Propaganda model)’이라는 학술용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권력에 충실하고 여론 통제 힘을 보탠 뉴스들을 기억하고 있다.
“언론은 무엇보다 언론을 통제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사회의 강력한 이익집단을 위해 봉사하고 선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먼의 이야기가 식상하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비슷하다. 이미 경험하고 또 경험한 내용들이어서다. 하지만 그 식상함은 곧 부끄러움이요 씁쓸함이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명제를 언론이 현실로 만들어 줄 것이란 장밋빛 환상을 품고 있진 않았지만,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주춧돌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믿는다. 그 믿음으로 여의도에서, 부산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와 사람들의 냉대, 비열한 힘과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또 한숨이 나온다.
결국 ‘언론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물음표가 남기 때문이다. 선전모델은 언론이 얼마나 지배층의 통제를 받으며 그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구조’의 문제를 지적한다. 기자 개인의 정의로움, 사명감과 별개의 문제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구조의 문제는 그만큼 견고하고 생명력이 질기다. 정보는 대개 ‘힘’을 따라 흐른다. 언론은 이 ‘정보’를 다룬다. 근본적으로 권력의 손 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다만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민주화`는 ’거리두기‘의 다른 말이었다. 1987년 민주화로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힘’은 빚쟁이처럼 찾아왔다. 자본 앞에서, 정치 앞에서 언론은 상상 이상으로 쉽게 흔들렸다. 언론인으로서 양심을 지키려 몸부림쳤던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야 했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몸을 붙이고 있어야 했다.
어제 일이 아니다. YTN 기자들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빼앗겼고, 국민일보․부산일보 기자들이 펜을 놨다. 오늘의 이야기다. ‘권력의 민주화’라는 해법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충고가 어딘가 비어보이는 이유다. 베트남 전쟁과 엘살바도르․니키라과․과테말라의 선거, 테러 등 풍부한 사례를 촘촘히 분석한 글자들 앞에서 자꾸 한숨만 나온다. ‘얼마나 가능할까’란 의심이 떠나지 않기에, 그들의 부정의와 타협이 곧 우리의 것이기에.
30일 총파업을 시작한 MBC노조 ⓒ미디어오늘
<여론조작>의 저자들은 그래도 ‘대안미디어’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조금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이익을 좇지 않는 비영리․공영 매체들이 답이라고 주장한다. 공영방송 두 곳이 고장난데다 신문의 편 가르기는 날로 극심해져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트위터 등 SNS와 ‘뉴스타파’에 기대를 거는 까닭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막연한 의심은 남는다. 언론이 설령 진실을 전함으로써 대중의 정치적 의사결정에 도움을 준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의 한 걸음을 믿으면서도 왜 자꾸 회의하는가. 어쩌면 이 한숨의 뿌리는 부끄러움과 씁쓸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는 데 있는지 모르겠다.